한줄 詩 3890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건 기계음이다 친구의 죽음을 훔쳐보러 가는 길 악몽이 쏟아지는 검은 천을 길게 찢으며 간다 별들을 삼키는 터널과 심장 소리 들리는 강을 지나 지붕이 자꾸만 자라는 장례식장으로 간다 내 삶도 누군가 입력해 놓은 세밀한 지도 때문에 산과 강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설정된 길 위에서 자유로운 척 운전대를 잡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유분방했던 친구의 생애와 붉어지는 가슴속에 딱따구리를 키울 부모를 떠올린다 어쩌면 친구의 삶도 입력된 순서대로 시작과 끝을 맺었는지 모른다 문득 새가 찢어 놓은 붉은 길이 나타나고 내 몸은 현재 모르는 공간 위에 있다 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발신자의 징검다리를 건너 허공에 빗금을 긋는 강렬한 번개..

한줄 詩 2020.12.20

겨울 이력서 - 박병란

겨울 이력서 - 박병란 고졸이라고 썼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소리 없는 것들이 중력을 습득하는 중이다 가라앉지 않아도 된다면 날개 없이 나는 방법이 있을 거야 서울로 왔다 수표동, 겨울의 청계천은 모두가 열심이었고 발을 놓아주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버 에 내려 몇 걸음 못 가 울곤 했다 백 년 후를 상상하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아이를 낳고 한 곳에 눌러앉았다 무엇을 지켜야 할 때가 되면 연습 없는 삶은 자꾸 가라앉았다, 두터워지는 중력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다는 위로가 눈처럼 쌓인다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이력서를 쓴다 여자도 아내도 졸업했는데 고졸이라고 쓴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 박병란 그렇게 을지로 ..

한줄 詩 2020.12.20

섬 - 조우연

섬 - 조우연 이 거대한 묘목을 심는 시기와 심는 장소가 따로 없으나 강이나 산 주변같이 전망 좋은 곳에 심을수록 더 잘 자란다. 심고 나면 e-편한세상, 푸르지오, 더 #, 캐슬, 휴먼시아 식으로 명명한다. 사람들은 나무 옆구리에 굴을 파고 기어 들어가 물관과 체관을 점령하고 맹렬히 기생한다. 학명 Insula arbor*인 이 나무가 기원전 3-4세기부터 심어졌다고 하니 고대 로마 시절부터 사람들은 섬이라는 우울한 영역을 살아온 셈이다. 어떤 이가 또 오래된 작은 섬에서 추락했다. 그것으로 그는 격벽의 틀을 깨고 나무를 떠났다. 비를 받고 태양이 비춰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않지만 더 우람한 나무를 갖고 싶은 사람들로 이 벌레 먹은 수목의 군락은 날로 늘고 있다. *Insula arbor: Insul..

한줄 詩 2020.12.19

겨울비 - 백무산

겨울비 - 백무산 겨울비 천장에서 떨어진다 거실 바닥 흥건하다 보일러 배관은 얼어 부풀었다 그래도 바닥이 편하다 모든 바닥은 따듯하다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어쩌라는 거냐 문자메시지는 아침부터 부고다 세면실 거울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지디피 삼백불 밤 완행열차를 타고 볼 터진 운동화 한켤레로 열여덟에 떠난 공단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늙은 아버지가 있다 양치질할 때면 한번씩 가슴에 이는 불덩이는 쌓인 쇳가루와 시너 가스와 최루탄 연기 뒤집어지나 빈손과 상처투성이 그리고 툰드라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고맙고 부끄럽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

한줄 詩 2020.12.19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타고 길 떠날 때보다 철길 건널목에서 지켜볼 때가 더 좋다 냇물에 징검돌가듯 가는 기차에 서 있는 내가 간다 길을 옛길 맨 처음 기차와 만난 수십 년 앞 시간의 길 기차는 지나가고 건널목 맞은편 영화관이 문을 연다 기차가 얼마나 멀고 긴 시간 길을 되돌렸는지 극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일곱 살 사라진 기차는 먼 기적소리로 그 인생극장 영화 주인공이 '나'라고 그 '나'는 예순 해 앞 소년이 아니라 막 건널목을 건너온 오늘의 소년이라 말해준다 기차에 먼 산 가듯 가는 기차에 먼 시간 구르듯 구르는 *시집/ 겨울모기/ 여름언덕 그때 - 박인식 산을 오르던 그때 하늘서 내려온 능선과 바다에서 올라온 골짜기가 산정에서 만나 내외하며 살던 그때 인생 고개 넘고 넘어 산을 내..

한줄 詩 2020.12.17

선을 긋는다 - 황형철

선을 긋는다 - 황형철 별 하나가 몇억 광년을 살며 우주를 횡단한다 눈 깜빡하는 순간 지구를 스치고 마는 것이지만 중심을 벗어났을 때만이 가장 아름다운 선을 긋는다 너와의 시간이 천체의 일부였다면 홀연히 사라진 말들 또한 많고 많았으니 지금도 무한한 우주 어딘가 행성처럼 떠돌고 있을 못다 한 말들이여 네 마음에 별똥별 같은 선 하나 긋기는 했는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종(種)의 기원 - 황형철 혹을 지고 평생을 떠돌아야 하는 유목의 시간은 얼마나 무거운가 모래언덕을 넘는 일이란 소멸의 기점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여긴 적 있다 실은 멈춰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 죽음 생사존망은 신의 것으로 두고 더 깊게 들어가야 하는 운명이 있다 지나온 발자국이나 세상의 환란 같은 거 쉽게 모래에 덮이고야 말 것..

한줄 詩 2020.12.17

청어 - 윤의섭

청어 - 윤의섭 버스를 기다렸으나 겨울이 왔다 눈송이 헤집어 놓은 생선살 같은 눈송이 아까부터 앉아 있던 연인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저들은 계속 만나거나 곧 헤어질 것이다 몇몇은 버스를 포기한 채 눈 속으로 들어갔지만 밖으로 나온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노선표의 끝은 결국 출발지였다 저 지점이 가을인지 봄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눈구름 너머는 여전히 푸른 하늘이 펼쳐졌을 테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시간은 좀 더 빨리 흘러갈 것이다 끝내는 정류소라는 해안에 버스가 정박하리라는 맹목뿐이다 눈의 장막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않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일 등 푸른 눈구름이 지나가는 중이다 국적없는 눈송이들의 연착륙이 이어졌고 가로수의 가지들만이 하얀 속살 사이에 곤두서 있다 버스를 기..

한줄 詩 2020.12.16

우연한 아침 - 백인덕

우연한 아침 - 백인덕 기다리기만 하기로 했습니다 일주문 지나 바랜 잎 꼭지 위에 꽃이야 피든 말든 푸른곰팡이 몇 줌 이질(異質)의 사랑으로 위대(偉大)를 빚든 똥을 싸든 간밤 독주에 부은 목구멍 활짝 열어 싸한 숨결을 흡입합니다 죄(罪)는 어디서 오는가 죄(罪)는 어떻게 오는가 내려가는 계단은 벌써 은빛에 휩싸이고 한걸음, 그저 한 걸음이지만 나머지는 캄캄한 어둠, 모든 뒤란 살아, 아니 영원히 맞설 수 없는 얼굴일 뿐, 살의(殺意)의 미소이었든 위악(僞惡)의 만개(滿開)였든 이 아침의 새는 모두 제 이유로 날아갈 뿐입니다 말을 만나려거든 말이 오지 않는 길목에 지켜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목이 메는 말에 목을 매고 불만 가득한 볼펜을 꺼내 양손 엄지와 검지에 불을 놓습니다 검은 멍이 말갛게 씻길 때쯤 ..

한줄 詩 2020.12.16

동행 - 박윤우

동행 - 박윤우 살얼음 낀 유리컵이 창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두리번거린다 저쪽엔 너, 이쪽엔 나, 바깥엔 겨울이 있다 개 키우지 말랬잖아! 나무라는 너와, 배고픈 개를 집에 둔 내가 30년 만이라는 한파와 동행중이다 민박집 수도꼭지는 하마 얼어 터졌다 엉덩이를 변기에 내려놓다 불에 덴 듯 일어섰다 냉기에 치를 떠는 속살, 송곳바람이 도처에 손잡이 없는 문을 낸다 늙어 죽기를 바라다가 바라던 대로 늙어 죽거나, 늙어도 죽지 않아 죽어야지 죽어야지 빈말이나 하는, 산목숨이든 죽은 목숨이든 저마다 발이 시린 밤 겨울 새 몇 쌍이 더 두꺼운 겨울을 찾아 북쪽으로 날아간다 멀리서 온 저녁은 종일 저녁, 길 바쁜 아침은 벌써 아침이다 웅크린 바닥이 일없이 내려다보는 천정을 일없이 쳐다보고 있다 해가 중천이거나 ..

한줄 詩 2020.12.15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나의 불행이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이 춥고 어두운 곳은 이미 많은 이가 머물다 간 지옥이라는 말 알고 있습니다 순탄한 삶이 불행을 만나 쉽게 쓰러졌다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잦아들고 잊고 다시 살아가리라는 말 고개를 끄덕입니다 모도 알고 있습니다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

한줄 詩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