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섬 - 조우연

마루안 2020. 12. 19. 19:12

 

 

섬 - 조우연


이 거대한 묘목을

심는 시기와 심는 장소가 따로 없으나

강이나 산 주변같이 전망 좋은 곳에 심을수록
더 잘 자란다. 심고 나면

e-편한세상, 푸르지오, 더 #, 캐슬, 휴먼시아 식으로 명명한다.

 

사람들은 나무 옆구리에 굴을 파고 기어 들어가

물관과 체관을 점령하고
맹렬히 기생한다.

학명 Insula arbor*인 이 나무가

기원전 3-4세기부터 심어졌다고 하니
고대 로마 시절부터 사람들은

섬이라는 우울한 영역을 살아온 셈이다.

어떤 이가 또

오래된 작은 섬에서 추락했다. 그것으로 그는
격벽의 틀을 깨고
나무를 떠났다.

비를 받고
태양이 비춰도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않지만

 

더 우람한 나무를 갖고 싶은 사람들로

이 벌레 먹은 수목의 군락은 날로 늘고 있다.

 

 

*Insula arbor: Insula(고대 로마의 집단 주택 또는 섬) arbor(나무). 이 두 단어를 조합해 봄.
*시집/ 폭우반점/ 문학의전당

 

 

 



생이기정* - 조우연

 

 

아파트는 복도식인데 한 눈을 감고 1층부터 15층까지 몇 발짝 안 되는 베란다 난간을 쭈욱 세며 올라가면 한 동에 90세대가 매달려 있었다. 벼랑에 매달려 있었다.

 

제비들이 산다는 해안 절벽의 구멍들. 새끼를 낳고부터 더 덥거나 더 추울 것 같은 집. 푹푹 찌는 여름에도 에어컨 실외기가 걸리는 구멍은 손에 꼽았다. 공휴일이 아닌데 대낮에 뒷산 오르는 아비들이 많던 곳

 

연신 먹이를 나르는 아비와 어미들. 제비새끼들의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커지는 새끼들이 두려운 가난한 새들이 밤마다 끼욱끼욱 우는 소리를 냈지만 층간소음으로 시비 거는 일은 없었다. 가끔 바다로 추락하는 새의 소문이 돌면 복도는 오래 적막했다.

 

거실 없는 벼랑 구멍집이 재건축 된다는 풍문에 해 긴 저녁에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모처럼 새 장난감을 쥐고 잠든 아이 옆에서 부부는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으로만 돈 지 벌써 이십 년도 넘었다.

 

노동운동하던 집주인에게 보증금도 다 못 받고 나왔던 곳. 그때 노란 입을 철없이 벌리기만 하던 딸아이의 유치원 친구들도 어디 가서 빨갱이 소리 들으면서 알바를 하고 있으려나. 딱 구멍만큼만 자란 새들, 구겨진 날갯죽지를 펴고 벼랑으로 날아간다.

 

 

*생이기정: '벼랑에 사는 새'라는 제주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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