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비 - 백무산

마루안 2020. 12. 19. 19:02

 

 

겨울비 - 백무산

 

 

겨울비 천장에서 떨어진다

거실 바닥 흥건하다

보일러 배관은 얼어 부풀었다 그래도

바닥이 편하다 모든 바닥은 따듯하다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어쩌라는 거냐 문자메시지는 아침부터 부고다

 

세면실 거울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지디피 삼백불 밤 완행열차를 타고

볼 터진 운동화 한켤레로 열여덟에 떠난 공단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늙은 아버지가 있다

 

양치질할 때면 한번씩 가슴에 이는 불덩이는

쌓인 쇳가루와 시너 가스와 최루탄 연기 뒤집어지나

빈손과 상처투성이 그리고 툰드라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고맙고 부끄럽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소를 끌고 - 백무산


눈 덮인 낮은 집이 저 너머에 있다
사방 길은 지워지고 따듯한 섬 같은 집
감나무 한그루가 돛대처럼 지키고 있는 집
저녁연기가 목화섬처럼 깔리던 집

아궁이 곁불에 닭들이 졸고
아랫목에서 메주가 뜨고
설은 다가오고 까치는 마당에 내려와 놀고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몸을 녹이다 가고

장독간 가는 길에 눈을 쓸고 김치를 내오고
볼이 튼 아이는 눈밭에서 뛰놀고
입김 불어 손을 녹이며 아낙은
소 없는 외양간 아궁이에 소죽을 쑤고

산 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밤새 들리고
길을 재촉하는 부엉이 먼 산에서 울고

나는 아직도 희미한 그 집에 가고 있다
흙과 짐승과 나무가 주인인 집에
이랴이랴 소 한마리 끌고 돌아가는 중이다

갈수록 멀어지는 그 사람들 그 집에
내가 살던 집도 아닌 그 집에
이상한 일이다
수십년 동안 나는 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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