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누구나 언젠가는 - 박태건 벽은 등을 돌리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수백 개의 눈을 가졌다는 신화 속 괴물처럼 수천 개의 창문으로 무엇을 보는 것일까? 저 벽 안에는 수백 개의 의자가 있고 수천 번의 욕설을 받아주는 화장실이 있을 것이다 들어갈 것인가 나올 것인가 사람들을 토해내고 삼킬 때만 입을 여는 벽 무엇을 바라 벽이 되었나? 수많은 모서리를 품고 벽 속에 갇힌 벽 벽에서 나온 사람들은 벽을 닮아 무언가 골똘하다 누구나 벽 앞에 서면 벽이 된다 벽 앞에 벽 벽 뒤에 벽 벽이 끝날 때까지 모퉁이로 가자 또 다른 벽을 만나자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도가니집 - 박태건 늙은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장맛비 오는 전주의 오래된 식당인데 식탁은 좁아서 우린 한 식구 같다 혼자 온 사람,..

한줄 詩 2020.12.12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 황동규 오래 정성 쏟아붓던 텃밭 지우듯 지우고 싶은 사람을 지우면 무엇이 남을까? 잡풀 웃자란 남새밭? 낙엽을 쓸다 바람 가버린 가로수 길? 새벽에 예고 없이 동파된 수도? 힘든 추억 하나 눅이려고 빌린 외딴집 새벽에 눈 그치고 물이 그친다. 물 데우는 일 거르고 눈 가득 담긴 마당으로 나간다. 흐린 하늘 아래 눈 쌓인 언덕배기 하나 가까운 신기루처럼 떠 있다. 문득 탁탁탁 소리, 눈가루가 뿌려 올려다보니. 붉은색 검은색 흰색 회색 그리고 갈색 조금, 색색으로 그러나 튀지 않게 옷 입는 새 하나가 나무 위 단색 공간에서 눈을 털고 있다. '아 오색딱따구리!' 누군가 함께 감탄하는 기척 있어 주위를 둘러본다. 뵈진 않지만 그 누군가도 나처럼 손 내밀어 눈가루 받으며 나무 위룰 ..

한줄 詩 2020.12.12

그런 저녁 - 허림

그런 저녁 - 허림 투덕적 같은 바다 보자고 동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이거나 슬픔도 한몫했다 한 생이 아름답거나 쓸쓸했다고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간 후였다 노을 뒤에 오는 초생달처럼 어떤 이별 뒤에 오는 사랑은 더 뜨거워지거나 싸늘한 것 그림자 먼저 내안으로 숨는 것 버리고 싶은 내안에 숨은 당신이라는 것 그대 사랑은 일몰이 지나간 서쪽하늘 별로 뜨거나 뒤늦게 찾아온 열망으로 어두워지는 것 우정 동쪽으로 가면서 저무는 수평선 위 구름은 불을 지르고 황홀하게 사그라드는지 그런 저녁 너는 또 무슨 이야기를 밤새 풀어놓는 것인지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뭔 맛이래유 - 허림 눈이 온다 오막은 눈이 내려 하이얗게 깊어진다 온 사방은 눈으로 깊어지면 옛날에 옛날에 하..

한줄 詩 2020.12.11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모래에 젖는 꽃 - 최세라 모레, 라고 너는 말했다 왜 찌푸리며 너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모래 위에 앉는다 왜 하필 나일까 그날은 사람이 많아 외로웠지 두서없는 대화처럼 불쑥 씨가 튀어나오는 작은 복수박을 너에게 준다 흐릿한 연두색 몸피에 옅은 줄무늬 싸인펜으로 진하게 평행선을 그어 봤자 정수리와 배꼽에서 만나고 마는 선 모른 척 해 줘, 너는 말했다 모레에 모른 척 해 줘 조화를 쥐고 있었다 진짜 꽃보다 더 진짜 같아 킬리안 향수를 남김없이 부어 줬다 남김없이 복수박의 표면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나일까 킬리안 향수와 복수박의 관계처럼 이 아픔과 평행하고 싶어 주소도 없이 통증이 몸을 찾아왔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아 모래가 닿는 자리마다 물이 고였다 왜 하필 기다리지도 않고 모레의 모래가 지금 이..

한줄 詩 2020.12.11

첫눈 - 조하은

첫눈 - 조하은 육성회비 봉투를 비어 있는 채로 들고 간 날 등을 떠민 담임선생님은 빈 봉투 대신 들고 온 날고구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빈 봉투와 생고구마가 날아오르던 교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의자를 들고 벌을 섰다 미열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와 마구 돌아다녔다 헛것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 사시나무도 시름시름 앓았다 달아오르는 날이었다 창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그렇게 배웠다 - 조하은 육성회비가 없어 집으로 쫓겨 가던 날 밤 우우 비바람이 불었다 우산 없는 운동장에 우라질, 비가 쏟아졌다 숙자 엄마가 싸다 준 거한 저녁 식사에 배부른 담임은 이미 숙직실이 떠나가라 코를 골 것이다 담임선생의 서랍 속 중간고사 답안지도 같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천둥 속에..

한줄 詩 2020.12.08

알리바이 - 김유석

알리바이 - 김유석 둥근 벽시계 하나뿐인 방 들보에 목을 맨 사내가 축 늘어져 있다. 발바닥과 방바닥 사이, 천 길 허공을 어떻게 디뎠을까 자살과 타살이 함께 저질러진 듯한, 멎은 시계와 머리카락처럼 흩어진 방바닥의 얼룩은 사내를 살려낼 수 있는 모종의 단서...., 현재의 시간을 맞추자 바늘이 거꾸로 돌면서 얼룩 위에 물방울이 돋고 썩어 가던 냄새가 사내의 몸속으로 빨려든다. 아주 천천히 사내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릴 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쌓이는 물의 계단들. 사내의 몸이 모빌처럼 흔들리고 발바닥이 닿자 차갑고 두터운 틀로 변하는 물은 단말마의 전율을 통증으로 바꾸며 어떻게든 살아오게 했던 기억들을 뒤진다. 머리를 묶은 풍선과 가슴속 시든 꽃들, 손가락 새로 빠지는 모래알들. 목을 매야만 했던 까닭을 떠올..

한줄 詩 2020.12.07

안부를 묻는다 - 김이하

안부를 묻는다 - 김이하 문자로 부고가 오는 아침 남쪽 창으로 들어온 겨울 햇살이 북으로 머릴 뉘인 내 눈을 찌른다 어디 기댈 곳도 없는 삶이 그나마 뜨순 방바닥이라도 있으니 위안인가, 눈 감으면 그렁한 눈물 슬그머니 옆으로 새는 한낮 어디선가는 가스로 숨이 멎고 또 어디선가는 석탄 운반기에 감겨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나동그라졌다는 시대 무참한 주검이 실려 나가는 시대 그러고도 사람이 귀하다는 시대 나는 정녕 살아 있는가 오래 소식 없는 조카는 안녕한가 오래 돌아앉은 벗들은 안녕한가 정말 그런가 새벽 창공은 푸르렀으나 이내 찌푸리는 미간(眉間) 내 입으로 얼마쯤 멀어진 그대들 안부를 묻자니 차마 가슴이 떨려 저어하는 사이 술병이 넘어진다, 옛 애인 살던 그쪽으로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그냥, 그..

한줄 詩 2020.12.07

굴렁쇠와 소년 - 김재룡

굴렁쇠와 소년 - 김재룡 아우는 추운 도시의 뒷골목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내동댕이쳐져 자꾸자꾸 쓰러짐에 익숙한 굴렁쇠를 굴린다 잿빛 호숫가엔 표박(漂泊)하는 바람들이 걸어 다니고, 안개를 털며 일어선 산, 산맥 밖으로 떠나는데 우리도 실성한 가슴으로 강변을 헤매야 할까.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한기(寒氣)를 비껴갈 순 없을까. 참으면 참을수록 내부로 파고드는, 상(傷)한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바뀌고야 마는, 저 호곡(號哭)을 묻고 또 묻으면, 결국 우리의 가슴은 황폐(荒幣)해져 심장의 똑딱거리는 소리마저 독(毒)을 품게 되지 않을까. 가거라 오늘을 사는 눈물로 따스함 없이 시려운 얼굴 끝으로 자꾸자꾸 쓰러짐에 익숙한 굴렁쇠 오늘도 아우는 혼자 사는 방으로 쇳소리를 내며 굴리고 들어온다 *시집/ 개망초 연..

한줄 詩 2020.12.06

예술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 윤유나

예술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 윤유나 기다리지 않아도 눈이 오는 건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살 수 있는 방법인가 주교가 내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린 국화와 꽃말에 뒤섞여 화병에 꽂힌 태양 함께 성가를 부른다 당장 나뭇가지에 영혼을 나누어달라고 사산된 열매를 품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조작해낸다 나뭇잎, 물, 꽃, 우정 모든 언어를 품고 있는 평범한 소외 사람을 만들었지 안수에 씌어진 은총 대신 나는 나뭇가지를 생각한다 시멘트 바닥에서 이유 없이 연명하는 그래, 그게 삶일 수 있어 그런데 다 같이 노래하는 지옥은 왜 필요한가 청바지를 입은 젊은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을 크게 외친다 은총은 정말 청해야지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뭇가지를 장작불에 던져 넣는다 밤하늘 소리 ..

한줄 詩 2020.12.06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원하지 않는 일에도 운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

한줄 詩 20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