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행 - 박윤우

마루안 2020. 12. 15. 22:03

 

 

동행 - 박윤우


살얼음 낀 유리컵이 창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두리번거린다 저쪽엔 너, 이쪽엔 나, 바깥엔 겨울이 있다

개 키우지 말랬잖아! 나무라는 너와, 배고픈 개를 집에 둔 내가 30년 만이라는 한파와 동행중이다 민박집 수도꼭지는 하마 얼어 터졌다

엉덩이를 변기에 내려놓다 불에 덴 듯 일어섰다 냉기에 치를 떠는 속살, 송곳바람이 도처에 손잡이 없는 문을 낸다

늙어 죽기를 바라다가 바라던 대로 늙어 죽거나, 늙어도 죽지 않아 죽어야지 죽어야지 빈말이나 하는, 산목숨이든 죽은 목숨이든 저마다 발이 시린 밤
겨울 새 몇 쌍이 더 두꺼운 겨울을 찾아 북쪽으로 날아간다

멀리서 온 저녁은 종일 저녁, 길 바쁜 아침은 벌써 아침이다 웅크린 바닥이 일없이 내려다보는 천정을 일없이 쳐다보고 있다

해가 중천이거나 말거나, 개가 얼어터지지거나 말거나 식은 너와 며칠 더 캄캄해질 작정인 내가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근황 - 박윤우


마시던 커피를 쏟았다 처음부터 빈 컵이었다
안도하는 내 옆에 있지도 않은 얼룩을 보고 놀라는 내가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오늘 개밥을 줬던가? 곰곰 생각했다
내가 내 밖으로 나갔다면 일단 개사료부터 챙길 일, 나가 애인을 만나려고 머리를 빗는 나를 내가 내 뒤에서 훔쳐본다

버스를 놓친 나는 혀를 차며 승강장에 서 있고 제시간에 도착한 나는 좌석에 앉아 무심하게 안전벨트를 맨다
내가 나를 창밖으로 내다본다면 그때 나는 창을 연기하는 풍경이거나 풍경을 연기하는 오후쯤

나는 나를 삭제하는 데 늘 실패한다
덮어쓰기를 하시겠습니까? 오전의 내가 오후의 나를 지나치며 묻는다

어제와 내일, 이쪽과 저쪽의 내가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잔으로 커피를 마신다
내 안쪽으로 번지는 저 얼룩은 내가 엎지른 저녁일까 저녁이 엎지른 나일까

 

 

 

 

*자서


없는 사람 곁에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데, 테이블 위 물컵이 생각 좀 해 봐야겠다는 듯이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누가, 어디서 부삽으로 개나리 한 모다기를 삼목하고 흙 묻은 삽날을 수돗물에 씻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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