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마루안 2020. 12. 20. 21:47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건 기계음이다

친구의 죽음을 훔쳐보러 가는 길
악몽이 쏟아지는 검은 천을 길게 찢으며 간다
별들을 삼키는 터널과 심장 소리 들리는 강을 지나
지붕이 자꾸만 자라는 장례식장으로 간다

내 삶도 누군가 입력해 놓은 세밀한 지도 때문에
산과 강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설정된 길 위에서 자유로운 척 운전대를 잡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유분방했던 친구의 생애와
붉어지는 가슴속에 딱따구리를 키울 부모를 떠올린다
어쩌면 친구의 삶도 입력된 순서대로
시작과 끝을 맺었는지 모른다

문득 새가 찢어 놓은 붉은 길이 나타나고
내 몸은 현재 모르는 공간 위에 있다

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발신자의 징검다리를 건너
허공에 빗금을 긋는 강렬한 번개를 피해 달려간다
지금 바퀴가 밟고 가는 것은
친구가 버린 어느 날의 웃음이나 비탄 한 조각일 것이다

나는 세상을 부유하던 친구의 생과
물에 잠긴 내 생의 경계선을 막 통과하는 중이다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 파란출판

 

 

 

 

 


카데바 - 고광식


아직은 젊은 당신의 가슴을 열었습니다
참혹하게 불탄 흔적으로 까맣게 남아 있는
허파가 가르랑거리는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습니다
당신이 꽃다운 나이였을 때
누군가 가슴에 들어가 잔인하게 방화를 했군요

손쓸 틈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오장육부가 속절없이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한 계절을 밤마다 소리치다가
애간장도 뜨거운 열기에 오그라들었고요
불길을 잡으려 쏟아부운
알코올이 오히려 창자까지 태웠군요

당신 아버지는 허구한 날 욕설과 함께
가슴속으로 휘발유를 들이부었다지요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깨진 살림 도구를 내리밟고
집을 나갈 때도 당신은 불타고 있었고요
남들은 꽉 찬 만두소 같은데
텅텅 빈속을 안고 살아온 당신 신기합니다

그런데 당신 그거 알고 있습니까
까맣게 탄 황량한 가슴속에서
새싹 한 잎 나고 있는 거
당신, 이제는 누구도
가슴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속을 태우고 겉까지 태울 수는 없잖습니까



 

# 고광식 시인은 1957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민족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외계 행성 사과밭>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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