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무거운 겨울 - 박미경

무거운 겨울 - 박미경 유방 전문의라면서 왼쪽 가슴을 매끄럽게 읽는다 오른쪽 가슴이 긴장한다 반복하며 읽더니 세로로 1cm 밑줄을 긋는다 밑줄 친 곳 뜯어낸다 또 뜯어낸다 또 겨드랑이에서 네 번이나 더 콕 뜯어낸다 겁먹은 가슴 비늘이 돋아난다 그러고도 몇 년 콕콕 뜯어냈다 몸을 읽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어머니 피톨조차 의심하며 과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 소심한 며칠 어머니가 짜주던 빵떡처럼 셀 수조차 없는 많은 구멍 속으로 바람이 숭숭 들락거렸다 미래를 읽지 못하는 빗나간 예측 결코 잊을 수 없는데 언젠가는 병이 비밀처럼 스며들 것이라면 했던 말 또 하면서도 당당하게 떼쓰는 노환이라면 싶은 긴장이 오랫동안 머물던 쉰의 한쪽 몹시도 무거운 겨울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해원 - 박미경 늙은..

한줄 詩 2020.12.02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골목에서 골목을 잃다 - 박구경 벼룩시장에서 길을 잃고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니 겨울비가 소름이 돋듯 내리는 쓸쓸한 거리였다 배달 오토바이 탈탈거리며 자장면 내려놓고 간 뒤 소주로 굳은 면을 푸는 신문 지면이 아찔하다 반바지에 커다란 운동화를 신은 힙합처럼 피둥피둥 건들거리는 덩치 큰 아이들이 침을 뱉는다 누런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단 중년의 사내가 부자로 보이던 것은 연신 흥정도 아닌 반강재 반말 투로 제 부친의 추억이 있다며 만 원짜리 지폐를 흔들고 을러대며 야코를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덜덜 떠는 초라한 사내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지금은 시간을 다퉈서라도 팔아야 하지만 시간을 모르는 사정상의 한 점 시계 골목 속에서 또 골목을 잃고 생각을 재촉하는 건 비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시집/ 외딴 저 집..

한줄 詩 2020.12.01

주기 - 홍지호

주기 - 홍지호 선물하고 싶은 날에는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중얼거렸고 돌아누운 등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대답해주었다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에 언젠가 달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미안해졌다 우리는 무엇이 달의 모양을 바꾸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달이 유독 크고 밝은 날이고 그런 날은 유독 그런 날이라는 것도 돌아누운 사람아 힘든 날에 비가 비처럼 오는 날에 멀리서 집이 크게 보이고 금방 따뜻해질 거 같아도 골목을 다 걸어야 비를 다 맞아야 문 앞에 설 수 있다 무엇이 등을 보이게 했는지 나는 등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했다 달의 뒷면 보이지 않는 것도 때때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달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달이 크게 보여도..

한줄 詩 2020.12.01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무엇을 놓쳤을까 - 천세진 어디에서든, 어떤 것으로든 세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가령 앞뜰이 아니라 뒤뜰에, 장미가 아니라 수국을 심은 것으로 인해 다른 세계가 태어났으리란 걸. 늘 조삼하며 살았다. 낙엽 하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었고, 바람이 골목을 바쁘게 달려가면 길을 비켜나 담장에 바짝 붙었고, 바람이 달려가는 서슬에 아팝나무 꽃잎들이 배고픔을 하얗게 달래주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기도 했다. 무엇을 놓쳤을까. 장미꽃잎의 무게를 잘못 가늠했을까. 수국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선 공간을 잘못 측량했을까. 그도 아니면 이팝나무 꽃잎의 수를 잘못 헤아렸을까. 집으로 돌아오면 호주머니에 담았던 사람들이 건넨 이야기를 문 앞에서 비워내곤 했는데, 깜빡 잊고 집안으로 끌어들였고, 호주머..

한줄 詩 2020.12.01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초겨울 밤에 - 황동규 창밖엔 소리 없이 된서리 내리고 있었겠지. 밤 11시 반. 텔레비에서 말들이 날아오다 방바닥에 떨어진다. ..

한줄 詩 2020.11.30

월광소나타 - 권지영

월광소나타 - 권지영 어스름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울기 좋은 골목 앞에 먼저 온 달이 앓고 있다 달은 등 뒤로 이는 인기척을 알지 못하고 짙은 코발트 하늘을 향해 그렁그렁 목숨을 삼킨다 하루치의 눈물은 어디로 달려갈까 철제 대문 손잡이에 매달린 끈을 잡아당긴다 대문과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방의 현관문 그 안으로 쥐구멍 숨어들 듯 기어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잠을 청한다 다행이다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은 주인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하려 한다 울고 있는 달빛을 묻히고 들어오다 가루를 흘리지 않았던가 겉옷을 털고 신발을 소리 없이 벗었던가 인기척에 들뜬 방문이 열리지 않기를 숨 참으며 기도한다 날이 새면 다시 흔적을 지우듯 방 한 칸과 이별을 해야 할까 모두가 떠나..

한줄 詩 2020.11.30

구술녹취의 선입견 - 정덕재

구술녹취의 선입견 - 정덕재 나는 골목이 사라진 이후 생선 굽는 냄새 나지 않고 주머니에서 부딪히는 한 주먹의 구슬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주차 금지 표지판과 걸어서 넘기에 숨 가쁜 해발 4미터의 과속방지턱이 서운하다고 말했다 골목 벼람박에 좋아하는 여자아이 이름을 몰래 쓰던 백묵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다 여든다섯 박창규 할아버지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외풍 없는 아파트에 살아 지금은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숨 참다가 숨넘어갈 뻔한 시절이 지긋지긋하다며 냄새 없는 훈훈한 화장실에서 잠이 든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찬물 따뜻한 물 마구 쏟아져 따뜻한 손으로 칠십 년 전 만났던 윤팔례의 손을 꼬옥 한 번 잡고 싶다고 말했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

한줄 詩 2020.11.30

호더스증후군 - 배정숙

호더스증후군 - 배정숙 돌지 않는 행성에서 허공은 바람을 다스리지 못한다 작년에 핀 안개꽃이 자욱한 그곳은 불우함을 개의치 않는 나만의 제국 가지고 싶은 그 안의 꽃방이다 벽은 놀랍도록 단단해서 쓸모없는 오후가 가두어지고 낮달 꼬챙이가 박혀서 기억이 빠지지 않는다 길 찾는 달그림자만 소용과 오물 사이를 빠져나간다 나비가 묻혀온 꽃가루에서 쏟아지는 것은 모두 나의 당신 그리움의 커다란 무덤 속으로 빨려들어 가면 스스로 문이 닫히고 구르지 않는 수정이 된다 구르지 않는 돌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이 된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 철통같은 우주 당신의 이름을 소장하는 가치에 모두를 건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희고 따뜻하여 그곳에 영원의 무게를 묶어놓았을 때 안쪽의 광채는 다름 아닌 붉은 광기 별자리 하나의..

한줄 詩 2020.11.30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아버지의 소꿉 - 정병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놀이는 처음엔 농사를 팔아 밥을 만드는 놀이 -힘들기는 아이고 힘들어, 할배 할매도 한입 삼촌 고모도 한입 엄마도 우리도 한입 시내로 나온 아버지는 소꿉을 바꾸었다 과자와 사탕과 하드를 팔아 돈을 샀다 우리는 새 새끼들처럼 달게 받아먹었다 -어서어서 커야지. 아버지는 문 유리로 밖을 내다보며 가게 놀이에 몰두했다 -각시가 아파요. 아버지는 틈틈이 병원 놀이를 했다 혈압계와 미음 통과 호스 같은 소꿉들이 늘었다 흩어진 우리는 숨바꼭질에 빠졌다 -얘들아, 엄마가 죽었단다. 우리는 손님이 되어 아버지의 각시를 조문했다 아무도 없는 아버지는 환자 놀이에 몰두했다 -밥도 내가 먹고 잠도 내가 자는 거야. 아버지가 죽었다 안동포 수의에 검은 유건을 쓴 아버지는 제사 놀..

한줄 詩 2020.11.29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 김희준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를 좋아했다 날개가 색을 입잖..

한줄 詩 202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