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백장미 - 최세라

백장미 - 최세라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 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들어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인다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벽했다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우아하게 지는 법, 그게 일생 도달해야 할 지점인지도 모르죠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

한줄 詩 2021.01.07

우울이라는 거울 - 유기택

우울이라는 거울 - 유기택 화장실 벽에는 좀 크다 싶은 우울이 걸려 있다 초로의 사내가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픽서티브로 고정되지 않은 사내를 손으로 쓱 문지르고 세면대 앞에서 공들여 손금을 닦아낸 뒤로였다 우울이라는 거울의 건너편 뭉개진 사내가 싱겁게 모두 흘러나갈 때까지 세면대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귀 기울였다 우울이 환하게 켜지며 들어왔다 나간 가벼운 경련 검은 오줌 소리 가벼운 한숨과 노동을 벗은 사내의 몸 창문이 없는 그래서 과장된 물 내리는 소리 갑자기 어딘가 조금 막힌 게 틀림없어 보였다 고양이 아홉 목숨 같은 사내가 고요해지고 나서 우울이 아주 캄캄해졌다 아주 사라지는 건 없지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어쩌면 강아지라고 말하는 쪽이 옳다 다음 우울이 갑자기 벌컥 켜질 때까..

한줄 詩 2021.01.06

너는, 질문으로 가득 찬 계절이다 - 김윤배

너는, 질문으로 가득 찬 계절이다 - 김윤배 너는, 질문으로 가득 찬 계절이다 너는, 무엇으로 북쪽을 행해 마음 쓸려가는 겨울을 견딜 수 있냐고 묻는다 너는, 한밤중 바다가 기울며 쏟아지는 눈물은 아픈 봄 아니냐고 묻는다 너는, 불꽃이 시들고 난 뒤에 오는 어둠을 여름 달빛이 건널 수 있느냐고 묻는다 너는, 목숨을 걸었던 언약이 언제까지 가을로 기록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세상은 모르고 너만 알고 있는 절망은 어느 계절이냐고 너는, 국경 흐려지는 지도를 보며 묻는다 세상은 알고 너만 모르는 희망은 어느 계절이냐고는 묻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난파의 계절이라 하더라도 죽어서 심장이 살아남는 별 너는, 그 신성을 영원히 이름 없는 별자리로 둘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한줄 詩 2021.01.06

붉은 여우를 위하여 - 백인덕

붉은 여우를 위하여 - 백인덕 길도 집도 없다, 당연하게 허방도 곡간도 없다. 방향도 목적도 없다. 그러므로 이웃도 원수도 없다. 해진 눈밭 구릉 위에서 너는 울지만, 언제까지 울 것인가? 없는 영원도 만들어 그 끝까지 울 것 같은 겨울 정신의 붉은 여우들 변두리 한적한 지하철 계단 옆 늙은 도시의 데코레이션처럼 반쯤 빈 리어카 몇 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그 앞 포장마차에서 피워 오르는 훈기(薰氣), 한 잔이 종일 비었던 뱃속으로 흘러들리라. 아니, 그랬음 바라면서 장갑을 꺼내 낀다. 오늘은 책가방을 메지 않을 것이다. 달빛 선연한 밤길에선 등 뒤로 솟아난 칼에 내가 먼저 소스라칠 테니 추운 날은 차가운 정신으로 달빛에 희미한 길을 그저 열심히 걸어가면 그뿐, 모르고 지나치는 자작나무 하얀 외피(外皮..

한줄 詩 2021.01.06

순정한 시간 - 이강산

순정한 시간 - 이강산 원앙여인숙 간판에 불이 켜졌다 목 꺾인 늙은이가 하나둘씩 달방으로 들어간다 역전 통 뒷골목, 인력시장 채소전 그 뒷골목 여인숙 간판들이 붉은 기지개를 켜는 저녁 퇴근길의 동태와 열무와 순대국밥이 일제히 목장갑을 벗고 지폐를 센다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한 장 펼쳐서 세고 지폐의 머리를 돌려 다시 센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하룻밤이 무사하다는 것처럼 지폐를 넘기는 고요한, 순백의 몰입 그 손놀림을 훔쳐보자니 아주 오래전 내게도 저와 같은 풍경이 있었다 눈 내리는 장터 바닥이었다 톱 장수 아버지의 가마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지폐를 세던 어린 날 장돌뱅이 역마의 습작이 눈사람처럼 쌓이던 순백의 밤, 내게 그처럼 순정한 시간은 다시 없었으니 그 추억의 지폐를 넘기는 밤마다 내 생의 달방..

한줄 詩 2021.01.03

겨울을 지나는 법 - 조하은

겨울을 지나는 법 - 조하은 웅크린 이름이 달아날 곳 없다 개인회생 제6호 법정 아내의 원망과 아이들의 외면이 겨울바람을 타고 와 성공과 실패의 중간지대에 둥둥 떠 있다 단 한 번도 편히 뛰어보지 못한 심장 화석처럼 굳어지는 시간 몸을 세워주던 뼈들 뚝, 뚝 꺾이는 소리 한 개비의 담배 간절하다 말아 올린 연기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멀리 달아날 수 있다면 좁고 길게 달려들던 이방인의 겨울은 한 겹 두 겹 두꺼운 외투를 벗는 동안 다시 사는 언어를 입을 수 있으려나 봄꽃이 떨어져 쌓이는 시간 봄은 잠깐 외출했다 치욕이라는 이름의 틈새에서 회생이란 단어 하나 받아들면 낙타 등처럼 구불구불하던 시간들 주춤주춤 물을 채운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독서의 기원 - 조하은 오라비는 둘둘 말..

한줄 詩 2021.01.03

그래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 윤일균

그래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 윤일균 노다지다방에 민 양 낮에는 애비에게 차를 팔고 밤에는 애비의 자식에게 티켓을 팔았다 노래방에서 악을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영춘옥에서 토끼탕을 먹으며 꿩의 소리를 지른다 코르셋, 복대를 누르고 선술집 젓가락 장단에 팔삭둥이를 낳은 민 양은 분명치 않은 애비를 근심타가 낮日 밤月 없던 시간 돌아보며 明이라 성을 붙이는데 아기는 성대로 밤낮없이 울었다 핏덩이 물 속에 던지며 새벽이여! 호수여! 하늘이여! 입 닫으소서 뒷걸음질에 가물치가 뛰고 황소개구리는 으왱으왱 울었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마이크를 잡은 여인은 이십 년도 전에 노다지다방 그래, 민 양이다 화면 이름 明자 선명하다 수양아버지 용왕의 손에는 용궁에 입적하던 날의 사진과 기록 가물치와 황소개구리의 진술 ..

한줄 詩 2021.01.02

하루라는 윤회 - 신표균

하루라는 윤회 - 신표균 울어도 하루는 가고 웃어도 하루는 간다 울어도 내일은 오고 웃어도 내일은 온다 오늘이 가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일까 울거나 웃거나 가는 하루 사이에도 새싹은 돋고 신발 벗어 손에 든 사람들 천지간에 길을 내서 구름 타고 한 바퀴 지구를 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첫 - 신표균 탯줄 잘리는 공포 첫울음으로 하늘에 먼저 출생신고를 하고 아직은 햇빛을 볼 수 없는 눈 입술로 따뜻한 무덤 더듬어 초유를 빤다 첫니 나기 전에 옹알이부터 익힌 혀 스스로 터득한 원시 언어로 첫 질문을 던진다 첫사랑은 깨지고 첫 만남은 헤어지고 첫날밤이 깨소금이 아니라는 것쯤 오늘 깨달아서 첫 경험처럼 허탈하지 않아야 할 텐데 첫새벽이 가장 어두운 것을 깨우칠 즈음 처음은 다 그런 거..

한줄 詩 2021.01.02

마음의 방향 - 안상학

마음의 방향 - 안상학 마음이 몸 안에서 쫓아나가지 않도록 잘 간직할 것 삶이 깊은 바다에 이를수록 고독한 것은 당연하다 고독이 고독하지 않도록 마음의 방향을 내 안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할 것 높은 봉우리에 오를수록 고독한 것은 당연하다 고독이 비참하지 않도록 마음의 방향을 항상 내 안의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것 아무리 높고 깊더라도 마음이 절대 내 안을 벗아나지 못하도록 단속할 것 내 안이 우주라고 생각할 것 사랑하라 그렇더라도 지그시 바라만 볼 것 사랑하라 그렇더라도 우두커니 지켜만 볼 것 아픈 것은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 머리가 빠개지는 듯 명치를 도려내는 듯 온몸이 부서지고 흩어지는 듯 고통스럽더라도 절대 마음을 몸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두어 놓고 살아야 한다 내 몸은 내 몸에게 기..

한줄 詩 2021.01.01

제야(除夜) - 전영관

제야(除夜) - 전영관 달력 마지막 장을 넘겼다 백지일 텐데도 뒷면을 보는 감정은 미련의 합병증 바퀴에 깔려 죽은 새는 스스로 결정한 포기의 결과인지 바퀴쯤 피할 수 있다는 자만의 파탄인지 한 해의 취사선택을 복기했다 달력의 칸은 단정해 보이지만 달걀가리일 뿐 희망을 허망으로 오독했다 내일은 버겁더라도 내 일이다 어쩌다 술자리의 계산대 앞에 선 것처럼 마지막엔 농담 같은 혼자였다 우뇌는 괴사하고 살아남은 좌뇌 하나로 버티느라 치사량의 현기증을 혼자 앓았다 다들 당하는데도 희망이나 다짐 따위의 면식범들만 활개쳤다 피 묻은 잇바디를 드러내며 배회했다 제야가 그들의 대목인 것이다 불신하지만 다들 구매하니까 행복이란 사은품을 붙여놓은 맘대로 며칠씩 지우고 잠적해도 되는 일인용 달력을 들여놓았다 숫자는 힘도 없는..

한줄 詩 2020.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