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생은 가엾다 - 허연

생은 가엾다 - 허연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5.18 나던 해 광주로 전학 간 점집에 살았던 아이는 지금도 노래를 잘할까 소풍날 흑백사진은 지금도 웃는데 병 때문에 하루 걸러 학교에 못 왔던 그 아이는 지금 살아 있을까 살아서 그 소풍을 기억할까 꼬리연 잘 만들던 전쟁고아 아랑 파편에 맞아 흉 진 얼굴에 다리 불편했던 아랑 키워주던 어른 죽고 앵벌이에게 끌려갔다는 그는 어떻게 됐을까 사랑도 미움도 없이 성자처럼 죽어갔을까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하얀 당신 - 허연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

한줄 詩 2020.12.31

상처에 바르는 연고 - 김옥종

상처에 바르는 연고 - 김옥종 눈보라가 울음을 크게 울던 날에도 상처 난 갈대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바람이 들고나는 통로에서 누군가의 갈대는 시린 등을 내주어 부벼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외로움을 방치하지 말 일이다 더는 그 쓸쓸함을 묵혀 두지 말 일이다 네가 가장 나를 외롭게 한 이였으니 살면서 다 갚아줄 일이다 생채기는 안으로 내야 더 깊어지는 것을 소리 내어 울지 말 일이다 뒤돌아봐야 하는 것들에게는 아쉬운 세월의 발자국들을 그저 덮어버릴 만큼만 눈꽃이 쌓여 가슴을 헤집고 걸었던 그 길 위에서도 상처 난 갈대가 부러지지 않는 것은 사람이 들고나는 길목에서 누군가의 갈대가 속대를 비워 네 살을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해넘이 - 김옥종 잎새 하나 달지 못한 겨울나무..

한줄 詩 2020.12.31

꽃아, 가자 - 김점용

꽃아, 가자 - 김점용 꽃아, 가자 네 온 곳으로 검은 부르카를 쓰고 아무도 몰래 왔듯 그렇게 가자 검은 우물 속이었을까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 그 아래였나 푸른 별을 타고 색 묻지 않은 별빛을 타고 돌면서 삼천대계를 돌면서 꽃아, 가자 혼자 싸우듯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몰래 네 온 자리 색 입지 않은 곳 별 뜨지 않은 곳 가자, 꽃아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걷는사람 스위스행 비행기 - 김점용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여보, 잘 들어. 악성이고... 말기래. 아스트로싸이토마(astrocytoma)* 머릿속에 퍼진 것도 2기쯤 된대. 김 교수 말로는 생존율 중앙치가 13,4개월인데 표준을 벗어나는 케이스도 많대. 수술하자. 안 하면 6개월... 실은 그것도 힘들대. 입장 바꿔 생각..

한줄 詩 2020.12.30

우주의 행복을 누린다는 건 - 권지영

우주의 행복을 누린다는 건 - 권지영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 자는 아이의 감은 눈과 입술, 볼에 입맞춤을 하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 차가 많은 도로를 벗어나 길가 양옆으로 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하늘거리는 이파리를 늘어뜨린 나뭇가지의 질긴 생명력을 바람으로 느끼는 것. 흙이 틔우는 풀과 시절 꽃망울들의 맑은 인사를 받는 것. 파스텔톤 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 잠시라도 어디에 있는지를 잊게 되는 것. 무더위 피하여 그늘진 곳에서 숨 돌리는 것. 어둠이 내려와 두 다리를 뻗어 쉴 수 있는 시간 속에서 평화로운 밤을 맞이하는 것. 밝으면 밝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맞이해주는 친구가 곁에 있는 것. 거리낌 없이 나누는 차 한 잔과 산책, 떠나고 돌아오는 여행으르 통해 삶에서 만나..

한줄 詩 2020.12.30

허세나 부리며 - 서상만

허세나 부리며 - 서상만 -데자뷔 산수(傘壽) 사랑이 없어서 야밤이었다 하 많은 별빛 아래서도 나는 늘 혼자라서 서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은, 날 두고 먼저 떠난 그 누가 참 미웠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손거울에 불쑥 떠오르는 낯익은 질색 왜 새삼 그리워지는지 좀 알 듯도 해서 더 적막했다 그래봤자 이미 코리안 타임 죽을 자리조차 마땅찮은 땅 누가 뭐래도 더는 여기 독거할 수 없는 나의 바람기 잠시 천문도나 들고 허둥대다 유성처럼 휙 허세나 부리며 또 다른 자연으로 돌아가리 망쳐버린 웃음거리 가닥 안고 *시집/ 월계동 풀/ 책만드는집 그 뒤쪽 말없이 떠난 사람 돌아보지 마라 그 뒤쪽, 이미 멀다 저녁 푸는 물새도 그래서 우는 거다 # 서상만 시인은 1941년 경북 포항 호미곶 출생으로 성균관대 영문과와 고려대..

한줄 詩 2020.12.30

누구일까 - 강신애

누구일까 - 강신애 새벽 세 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 화재가 발생했다고 어서 대피하라고 안내 방송이 주민들을 흔들어 깨운다 불에 데인 듯 일어나 현관문 여니 층층 아파트 주민들 얼굴이 풍선처럼 떠서 어디야, 어디야, 소스라친 입김들 주고받고 있다 참 이상한 일 연기 한 오라기 없는 맑은 어둠 쿵쿵거리는 심장에 들이붓는 싸늘한 공기뿐 추운 낭하 끝까지 둘러보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웅성거림이 잦아드는 어디선가 불의 커튼이 천장을 깨고 이웃집을 넘어 유리창을 핥고 있을 상상에 이른아침, 화재경보가 복도에서 피운 담배 연기를 감지한 거라는 방송에 피식 웃고 말았지만 누구일까 한겨울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가슴에 들어찬 허기 하얗게 피워올려 꿈결에 든 모두를 불러모은 사람은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한줄 詩 2020.12.29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 황동규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 황동규 집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방이 생각나는 2018년 12월 28일 아침,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 18도. 두툼한 모직 라이닝 댄 코트 입고 나섰어도 곧장 몸에 달라붙는 추위.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후들후들 떨기 시작하다 버스에 오른다. 안경이 흐렸다가 갠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그래, 다른 감각들도 눈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곤 했으면!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예기치 않던 향내 방 안에 은은하다. 살펴본다. 아 한란! 그동안 물 잘못 주어 여러 난 죽인 텔레비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전 선물로 들어온 난이 막 향내 풍기고 있다. 나는 한란 자주 죽이는 사람, 지금 꽃 피운 곳이 죽음의 자리인 걸 모르고, 깊은 숨 몇 번 들이쉬니 창밖 저 아래 밀어논..

한줄 詩 2020.12.29

허기에 대한 단상 - 이철경

허기에 대한 단상 - 이철경 삶은 돼지비계처럼 비릿하거나 잔칫날 적선한 돼지비계처럼 고소하기도 하였다 기름기라곤, 마을 잔치 외에는 들어찰 리 만무한 위벽은 귤껍질처럼 얇았다 그 얇은 풍선에 기름을 부으면 어김없이 부글거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위 속, 섬모의 기름기마저 깨끗하게 쓸려 나왔다 그날은 돼지가 일 년에 한두 번 요단강 건넌다던 설이나 한가위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내력 - 이철경 나쁜 시력도 집단생활을 청산한 후에야 안경을 맞출 수 있었듯 유년의 단체생활은 지병을 만드네 종일 노동에 시달리던 시절, 일을 마친 후 강가 멱 감다가 어린 나이에 한쪽 귀를 잃은 후 난청과 이명은 나의 삶 몰려오는 파도에 터지기도 뺨 맞은 타격으로 터지기도 비행 중 기압에 터지기도 그럴 때마다 고막이 뚫리..

한줄 詩 2020.12.28

중하순 무렵 - 정충화

중하순 무렵 - 정충화 언제부턴가 만취한 뒷날엔 변기 속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 날 내가 낳은 배설물들은 탁도를 높인 채 바닥에 검게 웅크리고 있다 내 몸에 가득 찼던 달은 눈에 띄게 면적이 졸아들었다 간간이 또래의 사람들이 꺾이는 것을 본다 그들 삶이 종영되는 것을 보면서 내 것의 상영 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부질없는 셈으로 걱정을 쌓기도 한다 술을 마실 때마다 몸 안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게 보인다 나의 수계는 천천히 낮아지고 있다 하부 깊은 곳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침식들 나는 어릴 적 지나쳤던 홍역을 이제야 치르고 있나보다 *시집/ 봄 봐라, 봄/ 달아실 눈꽃 - 정충화 몸을 씻다가 밋밋한 가슴팍과 치모 사이에서 흰 터럭 몇 오라기를 보았다 나 모르는 사이 몸 구석구석에 눈이 내리고 있었..

한줄 詩 2020.12.28

월요일 - 홍지호

월요일 - 홍지호 처음은 자꾸 지나간다 관대한 척을 하면서 키스가 있었다 하루종일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이 숨쉴 때 나는 냄새가 들락날락거렸다 바퀴가 터진 스쿠터처럼 처음은 지나갔고 이제 키스를 해도 당신의 숨이 들락거리지는 않는다 처음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자꾸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게 되었다 처음이라고 하면 선생이 되어주니까 선생이 늘어가고 미숙함을 이해해주었다 초범이라는 단어가 형량을 줄이는 것처럼 데뷔작을 태워버리고 차기작을 발표한 작가가 있다면 그리워하겠지 형량은 늘어날 것이다 찾고 있던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를 만든 건 처음이지요? 세상을 만든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면 봐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시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문학동네 토요일 - ..

한줄 詩 2020.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