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마루안 2020. 12. 15. 21:52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나의 불행이
세상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고
이 춥고 어두운 곳은
이미 많은 이가 머물다 간 지옥이라는 말

알고 있습니다

순탄한 삶이
불행을 만나 쉽게 쓰러졌다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잦아들고
잊고
다시 살아가리라는 말

고개를 끄덕입니다

모도
알고 있습니다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한명은 사장님 같고 한명은 직원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임대료가 턱없이 올랐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

집까지 걷기로 한다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시인의 말

쓰겠습니다.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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