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청어 - 윤의섭

마루안 2020. 12. 16. 22:20

 

 

청어 - 윤의섭


버스를 기다렸으나 겨울이 왔다
눈송이 헤집어 놓은 생선살 같은 눈송이

아까부터 앉아 있던 연인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저들은 계속 만나거나 곧 헤어질 것이다
몇몇은 버스를 포기한 채 눈 속으로 들어갔지만
밖으로 나온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노선표의 끝은 결국 출발지였다
저 지점이 가을인지 봄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눈구름 너머는 여전히 푸른 하늘이 펼쳐졌을 테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시간은 좀 더 빨리 흘러갈 것이다

끝내는 정류소라는 해안에 버스가 정박하리라는 맹목뿐이다
눈의 장막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건 기다리지 않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일
등 푸른 눈구름이 지나가는 중이다
국적없는 눈송이들의 연착륙이 이어졌고
가로수의 가지들만이 하얀 속살 사이에 곤두서 있다
버스를 기다렸으나 이 간빙기에서는 쉽게 발라지지 않았다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표랑 - 윤의섭


지구였다
눈을 처음 본 곳은
나풀거리는 얼음 결정이라서가 아니라 자유낙하가 신기한
지구였다
처음 사랑을 겪어 본 곳 지구였다
함께 눈을 바라보았고
혀를 내밀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혀끝에 얹혔다
이 지구는 온갖 계절을 지나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일 년 후로부터 흘러왔다
삼백육십오 개의 달과 태양으로 닻을 매달았어도 머물지 못하고
다시 사십이억 년을 맴돈다
지구였다
처음 본 곳
내 생애의 끝에서부터 떠내려 온 듯한 너를 만난 곳은
북극성 남십자성 카시오페이아 그 많은 별들 모두 아니고
지구였다
우린 집을 짓고 여행을 하고 산을 올랐다 그 이상은 걸어 갈 수 없다
앞으로도 수백억 년쯤 떠돌아야 할 곳은
지구였다
당분간은 살아야 할 곳
우린 늙어 가면서 일 년 후의 눈송이를 혀끝으로 받아낸다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광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0) 2020.12.17
선을 긋는다 - 황형철  (0) 2020.12.17
우연한 아침 - 백인덕  (0) 2020.12.16
동행 - 박윤우  (0) 2020.12.15
눈물도 대꾸도 없이 - 유병록  (0)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