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드라마를 보는 저녁 - 정이경

드라마를 보는 저녁 - 정이경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한 창문 너머 몇 번의 파랑이 지나갔을까 한 삼십 년이 지나자 언성 높여 싸우지 않아도 왜 각자의 방으로 파고드는지 지붕보다 높이 자란 감나무도 다 알게 되었다 길 건너 빨랫감처럼 후줄근한 재개발 지역 현수막과 함께 철거가 시작되고 떴다방과 부동산중개소가 인근의 학군을 내세워 젊은 여자들을 불러 모았다 삐걱대는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올라온 소식들로 꽤 여러 날 포개지는 모녀의 뒷모습 주인을 닮은 구부정한 처마 아래 세상의 이야기들이 아슬아슬하게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 중인 졸음이 담긴 고양이 눈동자가 있는 저녁 긴 골목 끝 휘어진 담장이 있는 집 아직도 무화과나무 그대로다 인기척 드문 대문 옆 모란이 피어 그나마 환한, 누군가는 이런 장면을 창문으로 달..

한줄 詩 2020.12.27

근황 - 이정훈

근황 - 이정훈 눈이 쏟아졌습니다 막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없던 건 올해도 없고 있던 것들만 여전합니다 장안 소문이 들릴 때마다 저는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도 변방 한 자루 총을 메고 숲속으로 치닫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가장 깊은 산맥 가장 높은 가지에 걸어놓겠습니다 영혼이라는 게 남아있다면 꽝꽝 얼겠지요 호벌(虎伐)이라고, 대장간에서 두들긴 낡은 화승총 한자루로 이놈, 불 받아라 눈 쌓인 산중에서 호랑이와 마주 서 소리부터 질렀던 건 심지가 타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책 음모라는 게 이 나라에선 다 이렇습니다 호랑이에게 아비 잃은 자식이 또 호랑이에게 아비 잃을 자식을 남깁니다 간신히 몸 가눌 정도로 자란 아들이 제 키보다 큰 총을 안고 산 입새 주막으로 갑니다 언제부턴가 못 미..

한줄 詩 2020.12.27

민달팽이 신발 크기 - 배정숙

민달팽이 신발 크기 - 배정숙 옛 어른들은 환갑을 넘기고 먹는 나이를 남의 나이라 했습니다 머리에 서리 내린 산국처럼 느긋할 것도 조급할 것도 없이 수묵화 한 점 꽃 지는 소리 핫것 두어 벌 껴입은 까치들 끼니 걱정으로 남긴 홍시 몇 개 같은 잉여일지 우수리일지 그 빈가지에 매달린 소생의 혀끝에 아직 어머! 하고 솟는 황홀한 눈물은 움인 듯 이모작인 듯 귀뚜라미의 헛기침을 노고지리의 노랫소리라 우기는 녹슨 이명에 인이 박혔다고 그래서 궁리가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고 안겨주는 꽃다발 계단을 내려오는 데는 정해진 방법에 따라야 하므로 뿌려진 반짝이를 멋대로 해독해선 안된다 느슨해진 오감이 밀고 당기는 삶은 세월보다 더 빨리 낡아가고 닳아 해진 신발이 대략 난처해지는 어느 날 비로소 이기는 자 패하는 자 비기는..

한줄 詩 2020.12.27

어둠에 밑줄 - 전형철

어둠에 밑줄 - 전형철 어둠의 시선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도려낸 오른쪽 심장 두 손에 쥐고 힘을 주면 수밀도처럼 흐를지 풍선처럼 터질지 오래된 수첩에 번진 밑줄 뜨겁게 달궈진 비를 맞으며 하늘을 부풀리는 바람과 뭍으로 달아나는 해초와 독한 새떼를 견디고 돋는 들풀들 파수 지난 어음을 돌리듯 밤은 불리는 이름이 많고 난간에 묶인 채 먼지의 메아리를 따라 저 바깥의 바다로 등대지기가 떠난 없는 동네의 있는 이름 먼저 내민 손을 거두며 밤마다 긋는 밑줄 내 오른쪽 심장의 해독, 어둠의 해도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이별은 미분 - 전형철 숫자는 종이 위에서 절룩거린다 리듬을 타고 춤은 오와 열이 무너진다 당신을 만난 것은 죄가 아니나 늘어진 취객의 멱살을 끌어올리듯 서서히 차오르고 있다 기억은 반..

한줄 詩 2020.12.26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 김희준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 김희준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 태양의 궤도를 따라간다 북회귀선에서 손을 놓친 아이 블랙홀에 쓸려간 아이 극대기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야 해 그날 손을 놓친 건 지구로부터 몸을 버리러 온 밤이었기 때문, 천진하게 떨어지는 아이는 무수한 천체가 되지 갈림길은 아이를 먹어치운다 사라지는 게 길이라면 해방된 아이를 묻지 않는 게 좋겠어 때때로 스펙트럼 행성에선 그리운 사람을 한평생 쓸 수 있는 이름이 내린다 편지 받았니? 국지성 문장이 쏟아진다 이마에 부딪히는 눅눅하고 달콤한 언어 이름은 아이가 되거나 아이들이 되었다 다정하게 내리는 것은 제철 햇볕을 닮아서이다 꺼내지 못한 말은 무지개에서 색을 내고 있었다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사탕 봉투..

한줄 詩 2020.12.26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 - 김대호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 - 김대호 참혹은 체한다 물래 삼킨 비겁도 체한다 육성으로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말을 전할 때 참혹은 섞여 있다 편집된 비겁이 섞여 있다 아름다운 것을 찾아 일생을 낭비했는데 불순의 세포가 아름다운 것의 최대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은 최근의 일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최소로만 반짝인다는 것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나는 줄 수 없다 당신은 떠나고 나는 남기에 나는 떠나고 당신이 남기에 목 아래 참혹이 체해서 꺽꺽대는데 아름다운 것의 최대가 눈에 어린다 내가 보고 가는 것은 이 세상의 최소이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주술 - 김대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고 말하는 게임 광고를 보면서 나는, 아찔하다 내가 건드린 것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었고..

한줄 詩 2020.12.26

쑥대머리 - 서정춘

쑥대머리 - 서정춘 아들아 나 어느 한 때 떠돌이로 삐리광대였느니 어렵사리 길은 멀고 한두 끼니 건넜을 때 울컥 거린 울분을 물키듯 퍼마시며 여기까지 흘러와 저 열두 발 폭포처럼 토악질처럼 북장단도 없이 쑥대머리 불렀느니 *시집/ 하류/ 도서출판b 파묘 - 서정춘 아버지 삽 들어갑니다 무구장이 다 된 아버지의 무덤을 열었다 설다선 이빨의 두개골이 드러나고 히힝! 말 울음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스쳤다 어느 날도 구례장을 보러 말 구루마를 끌며 하늘만큼 높다는 송치재를 오를 때 마부 아버지와 조랑말이 필사적인 비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인의 말 하류가 좋다 멀리 오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한줄 詩 2020.12.23

떠돌이까마귀처럼 - 이운진

떠돌이까마귀처럼 - 이운진 별이 떨어지고 어디든 날아가기 좋은 밤이다 나를 가져가서 나를 바꿔놓고 나를 버린 사랑을 잊을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검은 하늘 검은 구름 검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야지 기억을 매어놓았던 별이 떨어지는 날 늙고 느린 강이 혼자서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따라 울어 줄 사람이 없는 곳까지 풍경의 국경을 넘어야지 백 번을 바라보고 백 번을 기억했던 눈빛이 사라지면 구름에 관한 문장 같은 건 농담이 되는 싸늘한 적국에라도 닿아 한 자루 권총보다 더 쓸쓸한 역할을 나에게 줘야지 떠돌이까마귀처럼 당신으로부터 자유가되어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건조주의보 - 이운진 오지 않는, 혹은 올 수 없는 사람들만 기다리듯 눈을 기다린다 약속은 없었으므로 약..

한줄 詩 2020.12.23

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모멸이 얼음덩어리로 박힌 가슴팍으로나마 기어이 오면 이 언덕엔 어느덧 노랑제비꽃 피웠다 멸시와 비웃음 뒹굴고 비겁과 굴종이 길에 차이는 발걸음 이곳에 오면 두터운 먹장구름 아래 곧추선 물푸레나무 서슬 푸르다 구르는 비애와 날리는 체념 끝에 이곳에 오면 짧게 살아 푸른 잎, 끝끝내 살아낸 붉은 마음 어우러져 피었다 북풍한설 서리 내려 무덤을 덮고 죽은 듯 산 듯 허깨비처럼 걸어 얼음장 밑 흙살에 가 박힌다 한 줌 제비꽃 피워 올릴 뿌리 하나....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리영희 - 정기복 먹먹한 허공에서 눈이 내렸다 전조등에 비친 눈발은 불쑥 튀어 오르는 튀밥인 양 눈부시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며 길과 길 아닌 것의 경계가 위태롭게 그려졌다 바람 몰아치며 눈..

한줄 詩 2020.12.23

최초의 교환 - 류성훈

최초의 교환 - 류성훈 깨진 저녁을 걷어차자 빗맞은 구름이 가슴에 걸린다 단단히 넣어 둘수록 단단히 잃어버리는데 가진 것 없이 잃을 준비만 하다 나를 두고 올 때 아무런 말도 못 섞을 삶이 하나씩 는다 인간이 행한 최초의 교환은 고독이었을 것 너는 내가 오답이기 위한 선물 아직 거기 있을 나는 몇 월 며칠의 밤이 될 것인가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월면 채굴기(採掘記) - 류성훈 몸 누일 곳으로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 흡연 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리 속 돌맹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줄 詩 202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