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금빛 물고기 서쪽 하늘로 사라지다 - 부정일

금빛 물고기 서쪽 하늘로 사라지다 - 부정일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별 같은 것들 그냥 놔두지 못한 것이 죄라면 환란도 모른 채 연못에다 가두었다는 것이네 흩어진 비늘로 유린의 현장을 증언할 뿐 백로가 서쪽으로 날아갔다는 말에 허공에다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네 별들은 사라졌는데 남아있는 별 하나 총총걸음만 지난밤의 기억을 삭이고 있네 생은 미완에서 출발하는 미로 같은 것이어서 작은 소홀함이 불행의 씨가 되기도 하네 삶은 카멜레온처럼 온몸으로 절박해야 굶주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듯이 철모에 꽂혀 있는 솔가지와 풀잎처럼 물레방앗간 그날 밤처럼 은밀해야 부레옥잠을 풀어놓고 그 아래 있어도 없는 듯 별들의 소곤거림을 들을 수 있다네 별들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배후에서 다른 탄생으로 이 밤도 수없이 윤회..

한줄 詩 2022.09.25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가을에 도착한 말들 - 이기철 나무가 봄에 보낸 말들이 가을에 도착했다 열매를 쪼개면 봄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의 무지는 바람과 햇볕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풋 순이 열매의 몸으로 둥글어지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동시대의 비극에 등한했나 보다 전쟁 뉴스를 보며 밥을 먹고 세 개의 태풍을 맞으면서 희랍 비극을 읽었으니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모처럼 지구가 한 가족이 되는 날도 무덤들에게 그곳은 편안하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물소리를 따라나서던 한 해의 발이 멈추는 곳에 데리고 오던 생을 물끄러미 세워 둔다 나무에게도 나에게도 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이니까, 몸이 야윈 바람이 텅스텐 소리를 내면 더는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을 종이 위에 눌러 쓴다 열매의 말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 손가락에 침 묻혀 넘겨도 다..

한줄 詩 2022.09.23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 홍신선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 홍신선 돌아누운 내 등 뒤로 굽이치는 맑은 강물 소리 범람하는 실솔들 울음소리에 이내 잠도 꿈도 몽땅 떠내려가 버리고 고요에 귀를 대이면 이 고요를 강탈해 더 깊은 고요에 가 터놓는 경로당 앞 고목의 낙엽 흩는 소리. 누군가 먼 길 가는 신발이라도 찾아 신나 보다. 고래실 건넛집 안뜰에 불이 환하고 나도 이제는 마음 툭툭 털어 가진 것 모두 내려놓아야 하리. 실솔들의 강물 소리 말라 잦고 지난 잎들 다 떨구어야 비로소 헐벗은 체 본래에 돌아 가는 겨울 적막 앞에 마악 서기 직전 나무처럼. 가을 새벽 잠 깨어 보면.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한줄 詩 2022.09.22

녹슬은 나이테 - 배임호

녹슬은 나이테 - 배임호 오른쪽 새끼손가락 마디가 굵어졌다 오늘 보니 왼쪽 새끼손가락도 그렇다 무릎도 예전과 달라 조금만 먼 길 걷노라면 삐걱 소리 내고 그만 걸으라 빨간불이 켜진다 노화 증상이라고 아프지 않으면 그냥 놔두라고 이제 연골도 아껴 쓰란다 드디어 때가 왔나 보다 이런저런 나이테가 생겨 녹슨 부속품 속도제한 호루라기 소리 들린다 교통경찰관이 아니라 건강경찰관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시집/ 우리는 다정히 무르익어 가겠지/ 꿈공장플러스 어디쯤일까 내 나이는 - 배임호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하나 보다 난데없이 사진 찍어 곳곳에 올린다 나이를 먹으면 산책을 좋아하나 보다 눈비가 와도 걷는다 나이를 먹으면 시 쓰기를 좋아하나 보다 남들이 안 알아줘도 쓴다 내 나이는 어디쯤일까 봄날 온기만 맨날 맨날 가..

한줄 詩 2022.09.21

벼랑 끝 - 강시현

벼랑 끝 - 강시현 벼랑을 나는 새를 보았네 암벽에 걸린 목탁 소리 백척간두 진일보 아메리카 인디언이 몰살당한 계곡의 창공을 나는 새 거대한 날개의 양력으로 우주의 피안으로 가려는 디스커버리 검은 독수리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우리는 본디 벼랑의 날개에 집을 짓고 벼랑의 몸통에다 가정을 꾸리고 마지막엔 벼랑 끝에 올라가 스스로 눈먼 새가 되어 한 번의 비행으로 천지간을 건너는 디스커버리 미스터리 벼랑 멀리 아득한 쪽빛 바다 심해의 시간 건져 올리는 파도의 그물 한 걸음 더 내딛어 볼까 백척간두 진일보 디스커버리 우리의 더운 밥주발에는 상냥한 웃음으로 부드러운 손길로 미스터리 벼랑 끝으로 초대하는 로렐라이의 요정들이 요리되어 있었네 그래도 한 입만 더 백척간두 진일보 디스커버리 미스..

한줄 詩 2022.09.20

고독과의 화해 - 류시화

고독과의 화해 - 류시화 이따금 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기척이 난다 밖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문을 열러 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이 문 두드리는 것인지도 자기 밖으로 나가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문 열 구실을 만든 것인지도 우리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접촉 결핍 - 류시화 만약 자신이 죽었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면 당신은 허기를 느낄 것이다 뱃속 허기가 아니라 피부의 허기를 당신의 피부는 접촉을 원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가벼운 포옹, 어루만짐, 우연한 스침도 봄바람마저 당신의 얼굴을 간지럽힐 수 없다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뼛속까지 투명한 혼이 되어 누구도 그 손 잡을 수 ..

한줄 詩 2022.09.19

여전히 그 잔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 하상만

여전히 그 잔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 하상만 왜 어떤 사람은 백 년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삼십 년을 못 사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함부로 살아도 다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은 조심해서 살아도 사고가 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하느님은 먼저 데려간다는데 그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왜 어떤 사람은 몇 방울의 물방울도 미끌어지는가 바다를 헤엄쳐 건넜던 사람인데도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무너진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죽음 앞에서는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도가 소용없다 지은 죄도 없는데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모르는 죄가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군중의 살해자들은 왜 천년을 사는 걸까 아무런 고통도 없어 보인다 왜 어떤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가슴에 남을까 일부러 찾아간 적도 없는데 미..

한줄 詩 2022.09.19

눈물 속에는 - 김재덕

눈물 속에는 - 김재덕 글쎄, 젖지 않는 눈 있을 리 없지만 유난히 슬픈 눈은 있다 어젯밤 내린 눈이 그랬다 습설(濕雪)이라더군 작부 속눈썹처럼 떨어져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지붕을 내려 앉혔다 세상이 야단이다 어둠을 지우며 내리는 모습 누군가를 부여안고 내리는 듯 보인다 하늘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전설이나 기억 같은 그런 것들 아닌가 창틀에 내려앉은 한 녀석 그렁그렁 녹지도 못하고 망설이다 눈물 왈칵 쏟는다 잠깐 마주보다 주르르 어둠 속으로 떨어져 간 눈물 나를 아는 이 아닐까 언젠가 마주 잡은 손 놓고 떠난 이 멀리 갔다 오래 걸려 돌아온 그 사람 아닐까 바람으로 구름으로 떠돌다 슬픔으로 뚝뚝 듣는 그 사람 지나는 길에 겨우 들러 얼굴 한 번 보고 떠나는 눈물 같은 그 사람이면 어쩌나 젖은 슬픔들 또 울..

한줄 詩 2022.09.18

내 인생의 모든 계절 - 박노해

내 인생의 모든 계절 - 박노해 봄은 볼 게 많아서 봄 보이지 않는 것을 미리 보는 봄 여름은 열 게 많아서 여름 안팎으로 시원히 문을 여는 여름 가을은 갈 게 많아서 가을 씨앗 하나만 품고 다 가시라는 가을 겨울은 겨우 살아서 겨울 벌거벗은 힘으로 근본을 키우는 겨울 그러니 내 인생의 모든 계절이 좋았다 내 인생의 힘든 날들이 다 희망이었다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회갑(回甲)에 - 박노해 60갑자 생의 한 순환을 완주한 나이 회갑(回甲)에, 첫마음의 등불을 들고 내 살아온 날을 비춰본다 스무 살에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썼다 저를 쉽게 죽지 말게 하시고 고문대 위에서 내 사랑하는 이들을 배신하지 않게 하시고 가난과 고난과 비난 가운데 꿋꿋이 나의 길을 가게 하시고 내 생의 최후의 마침표로 ..

한줄 詩 2022.09.18

죽은 뒤에도 - 고원정

죽은 뒤에도 - 고원정 오랜만에 옛 선배의 묘를 찾아갔더니 그 선산을 중장비로 파헤치고 있었다 이리저리 연결해서 미망인 형수와 이십몇 년만에 통화를 했는데 문중에서 산을 팔았다고 공원묘지로 옮겼다고 했다. 죽은 사람의 새 주소를 받아적었다. 늘 호젓하던 후배 10주기라고 어느 시립공원묘지에 혼자 갔는데 납골당 그 유골단지에 그 부인 이름까지 씌어있었다 4년 전에 세상 떴다 적어놓았다 사진도 독사진에서 신혼여행 부부사진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저렇게들 웃고 있을까? (······) (······)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사도 다니고 늦게 온 사람과 만나기도 하고 밀린 이야기도 나누겠지 우두커니 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나직하게 물어보기도 한다. 괜찮으냐고 보이지 않는 삶보다 눈에 ..

한줄 詩 202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