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연한 아침 - 백인덕

마루안 2020. 12. 16. 22:12

 

 

우연한 아침 - 백인덕



기다리기만 하기로 했습니다

일주문 지나
바랜 잎 꼭지 위에 꽃이야 피든 말든
푸른곰팡이 몇 줌 이질(異質)의 사랑으로
위대(偉大)를 빚든 똥을 싸든
간밤 독주에 부은 목구멍 활짝 열어
싸한 숨결을 흡입합니다

죄(罪)는 어디서 오는가
죄(罪)는 어떻게 오는가

내려가는 계단은 벌써 은빛에 휩싸이고
한걸음, 그저 한 걸음이지만
나머지는 캄캄한 어둠,
모든 뒤란 살아,
아니 영원히 맞설 수 없는 얼굴일 뿐,
살의(殺意)의 미소이었든
위악(僞惡)의 만개(滿開)였든
이 아침의 새는
모두 제 이유로 날아갈 뿐입니다

말을 만나려거든
말이 오지 않는 길목에 지켜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목이 메는 말에 목을 매고
불만 가득한 볼펜을 꺼내
양손 엄지와 검지에 불을 놓습니다
검은 멍이 말갛게 씻길 때쯤
일주문 근처를 오래 서성거릴 요량입니다

기다리기만 하기로 했습니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산중음(山中飮) - 백인덕


산 중에서 아주 헐벗은 산,
기왕이면
사태(沙汰)로 무너진 자국 아직 성성한,
그 자리만 시퍼렇게 탱탱 언 날
쩍쩍 들러붙는 입술에 연신
더운 침 바르며
독주 한 잔 마실 일이다

세상에는 세상의 이법주
시에는 심법(心法)
심지에 불을 켜도
이 혹한에
날아가지 않는 새도 제 이유가 있는 법

깨진 돌 몇 개 끌어다
탑이나 하나 쌓고
산죽이나 떨기나무 시린 그늘과 마주앉아
독주(毒酒)나 한 잔 들이킬 일이다.
비감해져
오장육부를 비틀다 차라리
개처럼 짖을 일, 제 기름진 허벅지나
물어뜯으며 낮달을 부를 일이다

술 몇 잔에
건너가지 못할 세상은
어차피
두 눈 부릅뜨고도 건너지 못할 터


 


#백인덕 시인은 1964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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