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 이력서 - 박병란

마루안 2020. 12. 20. 21:37

 

 

겨울 이력서 - 박병란


고졸이라고 썼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소리 없는 것들이 중력을 습득하는 중이다
가라앉지 않아도 된다면
날개 없이 나는 방법이 있을 거야

서울로 왔다
수표동, 겨울의 청계천은 모두가 열심이었고
발을 놓아주지 않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버 에 내려 몇 걸음 못 가 울곤 했다
백 년 후를 상상하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아이를 낳고 한 곳에 눌러앉았다
무엇을 지켜야 할 때가 되면
연습 없는 삶은 자꾸 가라앉았다, 두터워지는 중력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다는 위로가
눈처럼 쌓인다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이력서를 쓴다
여자도 아내도 졸업했는데
고졸이라고 쓴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 박병란

 

 

그렇게 을지로 입구에 내립니다 도시인들이 발우를 어깨에 메고 기러기 떼같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밥줄은 튼튼한지요 있죠 얻으려는 마음 없이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 있나요 외로운 사람은 기를 쓰고 외로운 사람을 만납니다 손을 잡아요 아니 악수를 조금 길게 했지요 우리는 안으면 왜 눈물이 날 것 같습니까

 

장미여관 간판에 불이 켜집니다 들어간 곳은 지하식당입니다 다시 나가기엔 우리의 메뉴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지지 않는 조화는 핀 적도 없을 테죠 어쩌면 영원은 무시무시한 교훈이 아닐까요 시든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외로운 사람과 재미없는 사람 중 누가 먼저 장미여관에 갔을까요 새 한 마리 검은 가지를 물어나르는 을지로 우리는 아무 일 없이 헤어지고요 부러진 나뭇가지를 받아들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불이 꺼지는 장미여관 외로움도 만실입니다 누군가는 또 검어질 차례입니다

 



*시인의 말

이제 큰일이란 소용없어졌다.
나에게 큰일이 남아 있다면 시를 쓰는 일이다.
가장 소중한 일이 큰일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로한 모든 그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초의 교환 - 류성훈  (0) 2020.12.20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0) 2020.12.20
섬 - 조우연  (0) 2020.12.19
겨울비 - 백무산  (0) 2020.12.19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기차 - 박인식  (0) 2020.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