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이젠 떠나가리,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나는 잠들어 저 높은 하늘 끝 벼랑 위에 편안한 휴식의 자리처럼 황홀하게도 부풀어 올라 안온하게 꿈꾼다 저녁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저 어둠 한가운데에서 끝내 나는 백비(白碑)를 세우리 여름 지나면 가을, 가을 지나면 겨울, 그리고 봄, 나는 죽음에 길들지 않은 견고하고 투명한 입자가 되어 하늘에 섞일 것이다, 따로 또한 같이 너무나도 많은 빚 과분하게 져서 돌로 머리를 깨뜨려도 피처럼 살아 있을 평생의 죄 머얼리 구름에다 띄우고 나의 이력(履歷) 분분히 흩어져 갈 때 잘 가라,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그리고 새로움이여 *시집/ 조용한 폭발/ 황금알 모서리가 불안해 - 이수익 회양목 집단이 화단을 둘러서 ..

한줄 詩 2020.11.29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간혹 옛일로 잠 안 오는 날 나를 그렇게는 미워할 수 없는 일이라서 운명을 미워한다 태어났지만, 버려진 것이었던 가족사처럼 지상의 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는 일로 잠 안 오는 밤 혼자라는 말이 너무나 걸맞는 시간에는 구름 한 점으로도 가려지는 머나먼 외딴섬을 떠올린다 삶보다 친절한 바람과 바다 곁에서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내 이야기는 왜 아름답게 쓰이지 못했는지 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이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은 내 몫인지 차가운 혀로 나에게 해명한다 말해 주어도 믿을 리 없고 믿는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난처한 생을 안고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해 내가 슬픈 이유는 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

한줄 詩 2020.11.29

심인성 - 전형철

심인성 - 전형철 ​ 척수 눌린 짐승처럼 누워 있었다 차라리 몸의 병이 낫겠다 싶었지만 겁먹은 거미들과 며칠을 뒤척이는 동안 몸에 하나둘 돋아나는 두드러기들 구멍 난 옷의 구멍을 풀어 주고 싶어 구멍을 따라 옷을 찢는데 별일 없었다는 말에 무의식이라 답하는 의사 별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는 그 반대편 사람은 다 석판이 되어 가는 거란 생각 음각과 양각이 정과 칼의 소산이 아니고 마음의 마른 뿌리혹으로부터 천년 비문(碑文)처럼 인양되었다는 생각 주머니에 라이터와 몇 톨의 약을 품고 다닌 날들 속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내 몸에 얼굴 같은 게 담겨 있다 연중무휴 기사식당처럼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태몽 - 전형철 ​ 벗어 놓은 속옷을 보며 생..

한줄 詩 2020.11.28

생활의 북쪽 - 안숭범

생활의 북쪽 - 안숭범 사진을 반으로 접자 절취선 저편으로 숨는 얼굴 고장 난 손목시계와 함께 멈춘 시간 엊그제 판 명함에서 벌써 방을 뺀 글자들 안목 없는 남편을 둔 여자는 벌써 어머니가 되고 사랑이 나를 할 수 있을까 옮기기 위해 발명된 직장이어서 깎이기 위해 계산적으로 자란 손톱과 봉급이어서 생활의 북쪽에서 서정시와 욕설이 서로를 허락한다 어제처럼 저녁이 바지춤을 내렸는데 도시의 음모를 전에도 본 적 있어서 이렇게 지는구나, 사람들아 과연 참혹하게 아름다운 영화였고 가이사에게 줄 가이사의 것을 찾다가 사랑에 져 주던 마음이 진다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무교동 - 안숭범 너는 그런 때 세기말을 말했고 나는 한 종교를 잃었다 아직 작별 중인 사람들이 여기 아닌 곳에도 많다고 생각했다,..

한줄 詩 2020.11.28

두물머리 - 박윤우

두물머리 - 박윤우 서울을 다녀온 가을과 오리의 뭉툭한 부리 물기슭이 된 오후 네 시 가을은 제법 구체적인데 물이 물로 빼곡하다 물길이 물을 닦는다 광발 나는 저 물 곁에서 누구는 언약을 하고, 누구는 한 눈을 팔고, 누구는 담배를 문 채 내렸던 바지를 올리고 또 누군가는 물을 퍼 담아 물침대 매트를 채우겠다 오리가 물의 부리 모양의 구멍을 낸다 구멍 속으로 낙하한다 오리가 오리를 부려 넣고, 부려 넣은 오리를 오리가 들어낸다 부리를 앞세우는 새, 물갈퀴를 벗어두고 떠난 새 한 마리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운 중년 여인이 반백 신사의 겨드랑이에 날개처럼 돋았다 모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나오려고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나오는 사람, 그리고 오리백숙 분질러진 이쑤시개 같은 오후 네 시, 늘 네 시 5분 전인 백..

한줄 詩 2020.11.28

홍시 - 김인자

홍시 - 김인자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면 저렇듯 농익을 수는 없을 거고 제 존재가 뭉개지는 걸 두려워했다면 고공에서 저토록 가뿐히 뛰어내릴 수는 없을 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려놓는다는 것 돌려준다는 것 그곳이 본래의 자리인양 두려움도 초조도 없이 뛰어내려 본 자만이 아는 바닥의 안온함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낭만에 대하여 - 김인자 음악이 흐른다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거겠지 방파제가 보이는 2층 등대다방에 앉아 쌍화차를 시켜야 하나 망설이다 커피를 시켰다 대체 얼마만인가 불륜처럼 달착지근한 이 맛 갈매기 따라 김 양도 박 양도 떠나고 없는 지금처럼 낯설고 옹색한 여백에 홀로 놓여질 때 영화 속처럼 담배라도 한 대 꼬나물면 딱이겠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니, 내 꼬라지 그러하므로..

한줄 詩 2020.11.27

사랑 노래 - 심종록

사랑 노래 - 심종록 -홍시 온기 가진 것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려고 부산스러운 세상 기별 없는 날들 견디던 마음 흙벽으로 주저앉습니다 잊힌 걸까요. 기우는 햇발 동쪽으로 긴 그림자 끌며 설핏해지는데 황혼으로 쌓이는 소실점 앞에 선 사람이라서, 차마 사람이어서 세상을 지워버리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노라는 맹신 밀물로 차오르는 밤 나무는 폐부 깊숙이 숨겨 두었던 심지를 돋우고 그리움의 스위치를 올립니다 곧 다녀가시겠지요 기별이라도 주시겠지요 단념하지 못하는 마음 고봉으로 붉어지는 아침입니다 *시집/ 신몽유도원도/ 도서출판 한결 낙원동 - 심종록 1. 꽃들을 밟으며 노병들이 행진한다 꽃들의 시체를 태우며 북이 울린다 둥둥둥 폭풍이 몰려온다 신나는 구경거리 낙원동에서는 죽음도 즐거운 이벤트 환하도록..

한줄 詩 2020.11.27

저녁 변검술 - 김대호

저녁 변검술 - 김대호 저녁이 왔을 때 단지 몇 분만 관람이 가능한 석양이 찾아왔다 일대를 금빛으로 도금한 착시 앞에서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죄와 회한을 고해야 한다 저 황금빛 변검술은 쇠락한 태양의 가문에만 전해지는 비법이라서 화려한 금광을 채굴해 바쳐도 배울 수 없다 석양 앞에선 모든 것이 공평해졌다 낮에 나를 괴롭힌 고약한 집착도 석양빛에 물드니 스르륵 녹았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지중해 연안이 금빛으로 춤을 춘다 석양의 찰나 찰나의 석양이여 죽은 자들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 가장 숭고한 부위가 마지막으로 긴 띠를 이루며 길게 누웠다 죽은 자들의 안부란 생각보다 간단해서 발설하고 뭐하고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단막극을 관람하려고 하루를 기다리고 일생을 서성이는가 곧바로 ..

한줄 詩 2020.11.27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 강민영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 강민영 방에서 랜턴을 든 여행자를 꺼내줄 때가 되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들이 철없이 쿵쾅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가까스로 넘어갔다 그대로 죽게 해달라는 간절함과 어수선하게 쌓인 신발의 얼룩이 사방으로 흩어진 방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엄마는 길게 잠들어 있다 편해졌을 때 버려야 하는 신발, 옷가지, 기명들 몸피에 맞게 늘어날 대로 늘어난 날숨 엄마는 눈부신 대낮에 그걸 벗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지워지다 - 강민영 물비늘이 강을 밀고 올라오며 풍경을 지운다 안개 속에 납작 엎드린 마을 쌀 씻는 굽은 등이 어둠을 밀어내자 깨진 바가지 틈새로 바구미가 어른거리고 송아지 울음처럼 죽은 아기를 달래는 소리처럼 텅 빈 외양간이 운다 늘어진 나뭇가..

한줄 詩 2020.11.26

불면 - 정충화

불면 - 정충화 소리로 깨친 사람을 귀명창이라 한다지 요사이 전에 없이 귀가 밝아졌다 들끓는 소리들이 밤의 중문을 열어버린 뒤부터 내 잠은 만 리 밖 타향이다 밤과 나 사이 공명의 진폭이 얼마나 젊기에 차차로 어두워져야 할 내 귀가 아직도 이리 밝은 것이냐 *시집/ 봄 봐라, 봄/ 달아실 불면 2 - 정충화 대팻밥처럼 얇디얇은 잠의 부스러기마저 흩어지자 나의 밤은 항로를 잃어버렸다 닻 내릴 작은 섬조차 보이지 않는 난바다에서 끝없이 표류 중이다 잠의 몰골로 이끌어줄 예인선은 올 기미도 없고 고장난 배의 갑판에서 애꿎은 시간만 꾸들꾸들 말라비틀어지는 중이다 *시인의 말 충주, 이 고을에 세 들어 산 지 어언 십 년이다 그간 쌓은 정만도 서 말은 넘을 게다 식물을 들여다보고, 길을 걷고, 이곳 방언을 익히며..

한줄 詩 2020.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