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드라마를 보는 저녁 - 정이경

마루안 2020. 12. 27. 21:35

 

 

드라마를 보는 저녁 - 정이경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한 창문 너머
몇 번의 파랑이 지나갔을까
한 삼십 년이 지나자 언성 높여 싸우지 않아도
왜 각자의 방으로 파고드는지
지붕보다 높이 자란 감나무도 다 알게 되었다
길 건너
빨랫감처럼 후줄근한 재개발 지역 현수막과 함께 철거가 시작되고
떴다방과 부동산중개소가 인근의 학군을 내세워
젊은 여자들을 불러 모았다
삐걱대는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올라온 소식들로
꽤 여러 날 포개지는 모녀의 뒷모습
주인을 닮은 구부정한 처마 아래
세상의 이야기들이 아슬아슬하게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 중인
졸음이 담긴 고양이 눈동자가 있는 저녁

긴 골목 끝 휘어진 담장이 있는 집 아직도 무화과나무 그대로다
인기척 드문 대문 옆 모란이 피어
그나마 환한,

누군가는 이런 장면을 창문으로 달았을 것이다


*시집/ 비는 왜 음악이 되지 못하는 걸까/ 걷는사람


 




일요일에도, 일요일인 - 정이경


멀쩡한데도 새로 샀다
일요일처럼 자주 신게 될 거로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산엘 가지 못했다

여자고등학교가 마주 보이던 커피집 밖에서
흩날리던 벚꽃잎,
그녀의 입술에까지 닿은
이미 설레는 붉은 심장을 가만히 꺼내 놓았다

집에 돌아와 등산화가 담긴 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물 한 병을 가져간다 했고
찐 고구마나 팥빵이 대신한다고도
새로 산 등산화처럼 말했지만
끝내 어두운 동굴에 갇힌 허기진 휘파람 소리

이제는 지옥이나 천국에서조차
어설픈 비밀 따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지금쯤은 연옥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중일까  

그녀, 동굴 밖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에 새로 산 등산화를 영영 신지 못할 것이다
바위를 오른 적도 없이 상자째로 버려진 기도가 일요일을 지나쳐 갔으므로




# 정이경 시인은 경남 진해 출생으로 1994년 <心象>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노래가 있는 제국>, <비는 왜 음악이 되지 못하는 걸까>가 있다. 제1회 경남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하순 무렵 - 정충화  (0) 2020.12.28
월요일 - 홍지호  (0) 2020.12.28
근황 - 이정훈  (0) 2020.12.27
민달팽이 신발 크기 - 배정숙  (0) 2020.12.27
어둠에 밑줄 - 전형철  (0) 2020.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