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마루안 2020. 12. 23. 21:49

 

 

모란공원, 사계 - 정기복


모멸이 얼음덩어리로 박힌 가슴팍으로나마
기어이 오면
이 언덕엔 어느덧 노랑제비꽃 피웠다

멸시와 비웃음 뒹굴고 비겁과 굴종이 길에 차이는 발걸음 이곳에 오면
두터운 먹장구름 아래 곧추선 물푸레나무 서슬 푸르다

구르는 비애와 날리는 체념 끝에
이곳에 오면
짧게 살아 푸른 잎, 끝끝내 살아낸 붉은 마음 어우러져 피었다

북풍한설 서리 내려 무덤을 덮고
죽은 듯 산 듯 허깨비처럼 걸어
얼음장 밑 흙살에 가 박힌다 한 줌 제비꽃 피워 올릴 뿌리 하나....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리영희 - 정기복


먹먹한 허공에서 눈이 내렸다
전조등에 비친 눈발은 불쑥 튀어 오르는 튀밥인 양 눈부시다

어둠이 천천히 물러나며
길과 길 아닌 것의 경계가 위태롭게 그려졌다

바람 몰아치며 눈이 날리고,
바람 잦아들 때 논둑, 밭둑, 봇둑에 눈이 쌓인다

마을과 들과 산에 난 길들
부음한 빛으로 비산비야의 설경이 가뭇없다

지워진 길, 가려진 이정표
벌판 위로 새벽 까마귀 한 마리 날아오르며 길게 울음 운다

잠시 운행을 멈춘 택시
라디오에서 탁한 음성이 쇳소리로 묻어난다

새벽이 가고 기침처럼 아침이 온다
한 생애가, 한 시대가 그렇게 막막하다

눈이 내려 쌓였고, 파주 벌판이었다.

 

 

 

# 정기복 시인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1999년 시집 <어떤 청혼>을 낸 후,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이 20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쑥대머리 - 서정춘  (0) 2020.12.23
떠돌이까마귀처럼 - 이운진  (0) 2020.12.23
최초의 교환 - 류성훈  (0) 2020.12.20
붉어지는 경계선 - 고광식  (0) 2020.12.20
겨울 이력서 - 박병란  (0) 2020.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