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신의 사슬 - 전형철

신의 사슬 - 전형철 뿔에 손이 닿기 전까지 나의 얼굴은 바닥의 소유이니 시간의 틈을 가르는 성상(聖像)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결빙의 바람은 가장 낮은 자의 배후 얻지 못한 몸과 다시 소환할 수 없는 주문(呪文), 끝내 뒤편에 닿지 않아 완성되지 않을 이름에게 매혹의 낱장으로 나누어진 하루를 어떤 무늬로 새겨 넣을 것인가 이편저편의 문을 찾아 꼬리표를 붙이고 흔들리는 빛의 신탁 숨구멍을 파고든 천 개 별 어둠의 심장을 들고 여젼히 그 무엇도 아니어서 나는 이름 이후의 사람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세한도(歲旱圖) - 전형철 몸속의 지류를 더듬는다 흐르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며칠간 금식한 속이 비어 가고 있다 만지기라도 하면 흙담처럼 허물어 내릴 듯하다 물의 길도 허물을 벗을까 속 깊은 체념,..

한줄 詩 2021.01.15

새 - 김인자

새 - 김인자 완전한 고립을 꿈꾸며 사하라사막으로 숨어들었지 사랑에 빠져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지우고 날개가 퇴화되어 새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두 마리 새 두고 온 숲이 그리워질 때면 모래산으로 올라가 서로의 깃털을 다듬으며 흘러가는 구름에게 안부를 전하는 한때는 우리의 사랑도 저 새를 꿈꾸지 않았던가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낙타 등신 - 김인자 낙타는 허공의 붉은 바다를 무장무장 헤엄쳐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지붕도 문짝도 없는 길들이 돌아서면 지워지고 사라졌다 우우~ 낙타가 울었다 현생에 노마드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바람도 지쳐 쉬어가는 천막 속 온도계는 62도를 가리켰다 내 생애 비등점으로 기록될 살아있는 저 시뻘건 눈금 눈금을 확인하는 순간 땡볕에 앉아 눈 한 번 돌리지 않는 낙..

한줄 詩 2021.01.15

대한(大寒) - 김보일

대한(大寒) - 김보일 나의 병을 알고 너는 깊이 울었다 쇄골 근처 너머 눈물 묻은 자리가 따뜻했다 당신이라는 눈물의 온도에 오랜만에 나의 몸이 새집처럼 흔들렸다 방아깨비는 제 몸의 연초록을 어떤 풀꽃에서 옮겨 왔을까 누가 보면대(譜面臺) 위에 어둠을 올려놓았나 어떤 음악이 나무들에게 겨울의 출구를 가르쳐 줄까 스무 개의 발가락으로 질문들을 모으다 꿈도 없이 잠든 칠흑의 밤이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강 - 김보일 언제나 우리가 최후로 닿는 곳 그 너머의 거리가 우리를 출렁이게 한다 내 기억의 강물이 빠르게 방향을 트는 곳에서 내 살던 옛집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늘 아버지 같은 침묵으로만 가슴을 누르던 산은 개처럼 엎드려 우는데 알전구 촉 흐린 옛집 창에 마실 간 누이가 오지 않는 사이 개똥..

한줄 詩 2021.01.15

정시성(定時性) - 홍지호

정시성(定時性) - 홍지호 ​ 커튼을 치면 어두워졌다 일고 보면 그건 슬픈 일이다 사고로 딸을 잃은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어린아이가 된 거 같다며 웃는 아저씨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진다는 생각이 스쳤고 죄책감을 느꼈다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별수없이 좋아하는 음식의 종류가 늘어나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해도 꽃들이 자꾸 피어날 시간이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행성을 생각했고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먼지는 언제나 떠다니고 있었어도 누군가의 커튼 사이로 빛이 통과하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의 행성에서는 떠다니지 못하는 기차 사람들이 가득했다 빈 좌석들과 상관없이 기차는 조금도 지연되지 않았다 알고 ..

한줄 詩 2021.01.12

서울에서의 첫눈 - 정기복

서울에서의 첫눈 - 정기복 겨울을 앞질러 온 눈발이 쌓이지 못하고 도시 한귀퉁이를 서성대다가는 서둘러 진창을 놓았다 강화행 막차가 끊긴 신촌로터리 한쪽 담에 기댄 포장마차가 귀가를 놓친 승객 몇을 앉히고 꼼장어를 구웠다 쌓이지 못하는 게 눈만의 아픔이 아니란 걸 모두들 소주잔으로 확인하듯 이따금씩 고개를 젖혔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도도한 기형의 도시와 자본 내게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술을 끊을 수 있을까 겨울을 앞질러 막차는 가고 깨어진 안경이며 벗겨진 구두며, 신분증을 떠나보낸 취기가 첫눈 맞으며 나를 재웠다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들쥐의 내력 - 정기복 바람 쏠린 흙담 구멍 사이로 수숫대가 허연 뼈를 드러냈다 비스듬히 기울어가는 흙벽에서 헐어내린 진흙 말라 쌓이고 암팡진 개..

한줄 詩 2021.01.11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 여태천

혼자이거나 아무도 없거나 - 여태천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밤중에 일어나 끝이 없는 통증에 대해 생각한다. 혼자 불 밝히고 있는 가로등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써 버렸다는 듯 잠시 거기 기대어 숨 돌리는 남자 자정이 넘은 골목길을 힘겨워한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 개가 짖는다. 무엇을 더 잃어버릴 수 있을까? 남자는 어디서 오는 길일까?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손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하얀 봉지에는 아이에게 줄 선물이 담겨 있을까? 바람이 그의 성긴 머리를 살짝 건드리나 보다. 그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있다는 것일까? 생각은 자다 일어나서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아픈 몸을 타고 흐르는 신경처럼 외로움의 밤은 멈추지 않는다. 무음으로 켜 둔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테러와 ..

한줄 詩 2021.01.11

느티나무의 갱년기 - 박구경

느티나무의 갱년기 - 박구경 느티나무도 갱년기를 앓는다 자신의 그늘을 지붕 삼아 매일 거기 와 있는 젊은 농군의 트럭을 자식처럼 남편처럼 애지중지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하루는 감 농장에 감 실러 출발하는 것을 보고 아주 멀리 가는 줄 알고 괄괄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구불구불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슬픔의 뿌리는 맨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애타는 서글픔으로 뿌리를 깊게 질러 신고 그것을 끝까지 바라보느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빴다 이제는 없는, 이제는 멀리 떠나간 트럭 이별이야!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무침을 온몸으로 떨며 들판의 절명인 시선을 바꾸지 못한 채 한참을 굳어 있다가 고개 숙여 숨을 고르고 있었으니 그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소요마저 환청이다... 이 ..

한줄 詩 2021.01.11

세 발 고라니 - 김유석

세 발 고라니 - 김유석 발자국 하나를 어디 두었을까. 간밤 텃밭을 다녀간 좀도둑의 흔적을 더듬는 노인의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우뚱거린다. 그놈 같은데. 서너 해 전 밤눈이 올무처럼 둘러치던 외딴집 철사줄에 발목 하나를 두고 간 그놈. 제 발모가지 물어 끊고 눈밭에 생혈 적시며 사라진 그 녀석이 발자국 하나 공중에 들고서 다시 사람의 집을 찾은 것은, 봄동 앞을 망설이다 뜯지도 않고 돌아선 것은 배고픔보다 곡진한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였을까. 사람과 짐승 사이 텃밭과 야생 사이 사라진 발자국 하나 지팡이 절룩이며 찍어 넣는 노인.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행자 - 김유석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것은 그 걸음에 있다. 광막할수록 느릿느릿 걷는 법, 모랫바람에 쓸려도 서둘지 않고 자그시 눈을..

한줄 詩 2021.01.08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 피재현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 피재현 아버지는 죽었어요 어느 날, 얘야 나는 그만 살고 싶구나 아버지는 엄마를 끔찍이 사랑했는데요 가령 엄마는 꼼짝 안 하고도 살 수 있었지요 반찬도 사다 주고 은행도 잔칫집도 아버지가 다녔지요 엄마는 그래서 밭에서 부엌으로 난 길만 알면 됐지요 아버지가 얼마나 끔찍이 엄마를 사랑했는지 가령 아버지 죽고 엄마는 은행 가는 길을 몰라 밭에다 구덩이를 파고 돈을 묻었어요 어떤 날은 그 돈을 파내 처음으로 읍내 마트에 두부를 사러 갔지요 어느 날 엄마는 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했어요 아버지는 나이 팔십에 무슨 이혼이나며 억울하고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동구 밖을 서성였지만 엄마는 나에게 말했지요 얘야 컨테이너라도 좋으니 나 혼자 살 집을 알아봐 주지 않겠니? 아버지..

한줄 詩 2021.01.08

울음을 미장하다 - 손석호

울음을 미장하다 - 손석호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슬퍼서 웃었다 울음도 자주 울면 얇아져 미장 층처럼 거친 세상에서 쉽게 찢어지고 때론 낯선 지하도 바닥에 떨어져 덩어리째 아무렇게 굳었다 울퉁불퉁한 초벌 바름 표면에 밀어 넣던 통증 부스러기 흩날리고 햇볕에 그을린 당신이 재벌 바름 되기 시작하자 무엇이든 세 번은 발라야 얼굴을 갖게 된다며 바빠지는 흙손 흙손 뒷면에 노을이 들이치고 붉어져 선명하게 드러나는 화상흔 예상치 못한 화재였다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아물 때마다 뜯어내던 눅눅한 당신과 욱여넣어야 할 요철 많던 삶의 벽면 정처 없이 떠돌며 표정을 미장했으나 얼굴에서 꺼지지 않는 화염 노을에 불을 붙인다 이마에 기댄 팔뚝을 타고 타오르는 붉은 손목의 감정들 어디든 지나가면 ..

한줄 詩 202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