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떠돌이까마귀처럼 - 이운진

마루안 2020. 12. 23. 21:55

 


떠돌이까마귀처럼 - 이운진


별이 떨어지고
어디든 날아가기 좋은 밤이다

나를 가져가서 나를 바꿔놓고 나를 버린
사랑을 잊을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검은 하늘 검은 구름 검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야지

기억을 매어놓았던 별이 떨어지는 날
늙고 느린 강이 혼자서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따라
울어 줄 사람이 없는 곳까지
풍경의 국경을 넘어야지

백 번을 바라보고 백 번을 기억했던 눈빛이 사라지면
구름에 관한 문장 같은 건 농담이 되는
싸늘한 적국에라도 닿아
한 자루 권총보다 더 쓸쓸한 역할을 나에게 줘야지

떠돌이까마귀처럼
당신으로부터 자유가되어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건조주의보 - 이운진


오지 않는, 혹은 올 수 없는 사람들만 기다리듯
눈을 기다린다

약속은 없었으므로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야속한 마음으로 눈을 기다린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낙담의 한 형태

눈이 없는 겨울은
상실에 잠긴 중세 같아서
나는 지금 내 생애의 가장 메마른 사랑까지 생각하는 중이다

한때 나는 사막을 사랑했었고
사막을 담은 남자를 사랑하느라
눈물을 다 빼주었으므로

텅 빈 가슴으로 눈을 기다린다

속설없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내 체온으로 녹아 눈물이 되는 눈을 기다리며
햇빛이 조금 일찍 물러나는 허공에다
당신의 푸석한 슬픔을 위해서라도 내가 소용이 없었으면 좋겠어, 라고
딱 한 줄 편지를 쓰고

충분한 침묵을 두고, 충분한 기도를 가지고서
답장보다는 종잇장만 한 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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