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민달팽이 신발 크기 - 배정숙

마루안 2020. 12. 27. 21:11

 

 

민달팽이 신발 크기 - 배정숙


옛 어른들은 환갑을 넘기고 먹는 나이를 남의 나이라 했습니다

머리에 서리 내린 산국처럼 느긋할 것도 조급할 것도 없이 수묵화 한 점 꽃 지는 소리
핫것 두어 벌 껴입은 까치들 끼니 걱정으로 남긴 홍시 몇 개 같은 잉여일지 우수리일지

그 빈가지에 매달린 소생의 혀끝에 아직 어머! 하고 솟는 황홀한 눈물은 움인 듯 이모작인 듯

귀뚜라미의 헛기침을 노고지리의 노랫소리라 우기는 녹슨 이명에 인이 박혔다고 그래서 궁리가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고 안겨주는 꽃다발
계단을 내려오는 데는 정해진 방법에 따라야 하므로 뿌려진 반짝이를 멋대로 해독해선 안된다

느슨해진 오감이 밀고 당기는 삶은 세월보다 더 빨리 낡아가고 닳아 해진 신발이 대략 난처해지는 어느 날
비로소 이기는 자 패하는 자 비기는 자들이 즐겨 다니는 골목골목까지 막 눈에 익는데

아직 한 낮의 감정을 버리지 못한 채 맞이하는 어둡지 않은 어둠의 시간
이곳으로부터 에코 존 지역입니다
오르기 위해 수고로웠던 만큼의 내리막이지만 멈칫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집도 절도 벗어던지고
배밀이를 시작한 민달팽이가 신고 있는
무욕의 신발
크기와 속도를 맞추는 것이
예쁜 걸음이지


*시집/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시와표현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 배정숙


어둠은 북쪽에서부터 왔습니다
겨울이 오는 방향과 같았을 것입니다

안방을 거친 온돌이 죽은 놈의 콧김만도 못하다고 두런거리시던 엄마의 겨울 싸락눈이 문창호를 싸그락 할퀴면서 시무룩한 동짓달 밤이 길었습니다

자치기를 하던 머슴애들의 어깨로만 신록 같은 햇살이 야리야리했을 뿐 봄의 행로는 망연했습니다
셋이나 되는 오빠들 자랑이 잔망스러운 사팔뜨기 분순이가 다녀가는 날은 저녁상에 배가 아팠습니다

-쓸 자식 하나 없는 것들이
북통만한 방안이 아버지 서슬로 부풀어 터질듯 할 때는 엄마의 가랑잎 같은 심장에 부리부터 묻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처마 밑에 시래기로 매달려 씨받이치맛자락 바람소리를 퍼 나르고 초가지붕의 기울기는 달무리와 궁합이 맞아 박꽃이 피었습니다

느루 닳는 불안을 먹으며 상심만큼 키가 자라고 기울어진 저울추는 좀처럼 중심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아버지는 늙어갔습니다

아픈 말들을 내색하지 않고 걸음마를 익히는 동안 현실은 상상 쪽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문의 염원으로 치장한 남장여아를 울먹울먹 흘러가는 세월의 뒤편에서 고요하게 우는 방법을 배워갔습니다

편견의 형식으로 묻어둔 이름들
슬픔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