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 김희준

마루안 2020. 12. 26. 19:18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 김희준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

태양의 궤도를 따라간다 북회귀선에서 손을 놓친 아이 블랙홀에 쓸려간 아이 극대기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야 해

그날 손을 놓친 건 지구로부터 몸을 버리러 온 밤이었기 때문, 천진하게 떨어지는 아이는 무수한 천체가 되지 갈림길은 아이를 먹어치운다 사라지는 게 길이라면 해방된 아이를 묻지 않는 게 좋겠어

때때로 스펙트럼 행성에선 그리운 사람을 한평생 쓸 수 있는 이름이 내린다

편지 받았니?

국지성 문장이 쏟아진다 이마에 부딪히는 눅눅하고 달콤한 언어 이름은 아이가 되거나 아이들이 되었다

다정하게 내리는 것은 제철 햇볕을 닮아서이다 꺼내지 못한 말은 무지개에서 색을 내고 있었다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사탕 봉투에서 노란 앵무를 꺼내오렴

회귀선 구석에서 크레타섬이 말라간다 올리브 숲에선 한낮이 유괴되고

아이들은 어디에서 낡고 있을까

유기적으로 미로가 생긴다 미숙한 발음으로 새는 박애를 앓는다 열 달째 발육이 멈췄다 순간, 바람으로 재단되는 미궁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니까

어쩌면 궤도의 지름길을 알게 될 거야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사탕 봉투에 갇혀 있다 유산된 울음이 기운다

응 받았어 동봉한 노란 앵무도

생장하지 못한 아이는 애초에 없었다 셀 수 없는 밤과 하지 못한 인사를 기억했을 때

스펙트럼 행성이 쏟아진다

사원에서 가져온 날개를 꺼낸다 행성표류기에 적힌 고전적 얼룩을 읽을 수 있다면

올리브 동산으로 가자

구름이 행선지를 알려줄 거야

아이는 불가피한 귀결로 자란다 웜홀 웜홀

미로가 뒤틀린다 사탕을 깨물자 태양의 파장으로 스펙트럼이 터진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아르케의 잠 - 김희준


이 태생을 묻습니다 고대 도시에서 걸어온 우물이 미끄럽습니다 활엽수는 계절과 어울리는 뼈를 가졌습니다 무릎을 깨물자 평면적인 비가 내렸습니다 빗줄기가 원형을 유지한다는 말이 둥글다는 건지 뽀족하다는 건지 남의 말을 빌리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남이 이쯤에서 걸어와도 좋겠습니다 구름이 지퍼를 열어 비를 쏟아낸다거나 여닫는 소리에 천둥 치는 일이 상서로운 낡은 도시, 하늘이 남색과 가깝다거나 남쪽의 농도와 닮아서가 아닙니다 우물에 비친 나의 남과 남을 그리는 탈레스 근원을 찾기 위해 납작한 비린내를 읽어온 세 명의 남이 존재한다는 이유라고 해둘까요 기원전에 사라진 색이 산사나무 숲에 쌓여갑니다 활엽수가 근육부터 말라가는 계절에는 땅을 펼치기로 합니다 그곳에는 멸종된 밤을 입은 당나귀가 튀어나옵니다 오랜 잠을 걸친 짐승은 축축한 숨을 맡을 수 있습니다. 세 명의 탈레스는 눈동자를 비워두었습니다. 우물 앞에서 한 차례 폭우와 천측의 구도를 잽니다 차오른 고대 도시에 최초의 행성을 담급니다 비로소 남의 태생을 묻지 않았으면 합니다

 

 

 

 

# 김희준 시인은 1994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다녔다.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2020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스물 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십구재에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 나왔다. 여성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