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근황 - 이정훈

마루안 2020. 12. 27. 21:18

 

 

근황 - 이정훈

 

 

눈이 쏟아졌습니다

막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없던 건 올해도 없고 있던 것들만 여전합니다

장안 소문이 들릴 때마다 

저는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도 변방

한 자루 총을 메고

숲속으로 치닫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가장 깊은 산맥 가장 높은 가지에 걸어놓겠습니다

영혼이라는 게 남아있다면 꽝꽝 얼겠지요 호벌(虎伐)이라고,

대장간에서 두들긴 낡은 화승총 한자루로

이놈, 불 받아라

눈 쌓인 산중에서 호랑이와 마주 서 소리부터 질렀던 건

심지가 타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책

음모라는 게 이 나라에선 다 이렇습니다

호랑이에게 아비 잃은 자식이

또 호랑이에게 아비 잃을 자식을 남깁니다

간신히 몸 가눌 정도로 자란 아들이

제 키보다 큰 총을 안고 산 입새 주막으로 갑니다

언제부턴가 못 미덥습니다 장작패기 삼년, 

물지게질 삼년, 십리 밖 물동이 귀를 맞춰도

다시 바늘귀를 꿰라는 늙은 주모가 못 미덥고

푸른 하늘 흰 들판 이젠 못 믿겠습니다

화등잔처럼 번쩍,

산날 타넘어가는 달이 또 무얼 체념하게 합니까

부릅뜬 고리눈에 가득했던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가면 오지 않는 강원도 포수

지난해에 없던 건 예전에 이미 없어

산꼭대기 녹지 않는 저 눈밭

별고 없습니다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그때가 옛날 - 이정훈

 

 

어느 깊은 산골 서른 먹은 노총각이 열다섯 어린것을 각시라고 데려왔더니 아, 이것이 저고리 동정을 하나 달 줄 아나, 쌀을 조곤히 일 줄 아나 뭣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하룻밤엔 신랑이 내일은 장에 소를 내러 가야 하니 새벽 같이 밥하소,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해는 중천이요 각시라는 게 그때껏 한밤중이라 허둥지둥 집을 나서던 신랑 분김에 손에 잡히는 빨랫방망이로 엎어져 자는 각시의 볼기를 철썩 갈기고 가는데 각시 껌쩍 두리번거려봐야 신랑은 벌써 사립 밖

 

진종일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식식대던 각시 저녁때가 얼추 되어 신랑이 오도록 되었는데 밥 안칠 생각은 없고 설분할 궁리라 옳다, 내 볼기에 멍든 것 보면 네 맘 좀 아프리라 속곳 훌렁, 시퍼런 불기짝을 삽짝으로 둘러댄 채 신랑 올 때만 바라보다 고만에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그날따라 신랑은 장터에서 먹은 성삿술이 과해 주막에서 잠이 들고 집 앞을 지나던 애꿎은 장꾼들만 두고두고 맘이 아프다 못해 배꼽까지 아파했다는, 뉘 집 할애비 할미 소싯적

 

 

 

 

# 이정훈 시인은 1967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쏘가리, 호랑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