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최초의 교환 - 류성훈

마루안 2020. 12. 20. 21:56

 

 

최초의 교환 - 류성훈


깨진 저녁을 걷어차자
빗맞은 구름이 가슴에 걸린다

단단히 넣어 둘수록
단단히 잃어버리는데
가진 것 없이 잃을 준비만 하다
나를 두고 올 때

아무런 말도 못 섞을 삶이
하나씩 는다 인간이 행한
최초의 교환은 고독이었을 것

너는 내가 오답이기 위한 선물
아직 거기 있을

나는
몇 월 며칠의 밤이 될 것인가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월면 채굴기(採掘記) - 류성훈


몸 누일 곳으로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 흡연 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리 속
돌맹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 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창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 오고 있었다



 

# 류성훈 시인은 1981년 부산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숭의여대에 출강하고 있다. <보이저 1호에게>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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