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안심이 되었다 내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자꾸 미움에 가닿았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귀 같은 것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지문이 하나씩 사라져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방황이 습관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불쑥, 이라는 말은 어찌나 황홀한지 고흐가 제 귀를 잘라 버렸을 때 그걸 종이에 둘둘 말아 여자에게 건넸을 때 그리고 붕대를 감싼 자화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때 더 이상 슬픔은 자라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며 돌아서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잠가야 하는 것들과 잠기지 않은 것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지나가는 행인 - 이기영 그때 이상한 오후를 지나가는 중이었어 깎아지..

한줄 詩 2021.09.06

햇빛 한 줌 - 이산하

햇빛 한 줌 - 이산하 그는 사형수로 3년 6개월을 살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사형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고 무기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좁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날 그는 무심코 자기 무릎 위의 햇빛을 보았다. 북서향의 독방에 두 시간쯤 가만히 머물다 떠났다. 날마다 눈꺼풀 같은 창문으로 스며든 시한부 햇빛 그 햇빛이 무릎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을 때가 마치 어린 딸이라도 보듯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이 햇빛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햇빛은 또 찾아와 가만히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수시로 찾아온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날마다 무릎 위에 ..

한줄 詩 2021.09.06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빛나는 책 - 박현수 -스마트 폰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 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 거룩한 이론에서부터 가벼운 하소연까지 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 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 사고전서의 서적을 다 넣어도 오히려 자리가 남는 얇은 책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당신..

한줄 詩 2021.09.03

오래도록 - 이기록

오래도록 - 이기록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줏빛 유령 안에 들어가 밤새 온몸을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드라이플라워 - 이기록 아직 내가 젖지 않아서 너를 두고 있구나 가만히 두었는데도 너는 벌써 아무것도 남지 않은 구석에 들어와 있구나 휴일이 되어 술을 마셨고 검은 노래가 왔다가 사라졌는데도 너만은 유령처럼 옆에 서 있구나 그렇게 있구나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구나 이방인의 입술에 침을 바른다 ..

한줄 詩 2021.09.03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러시아의 목각 인형처럼 푸른 색조의 미소로 댐 같은 자비를 찾아 떠났다 보헤미안 언덕에 풍성하게 늘어뜨린 원피스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걷자고 해서 스스럼없이 걸었다 삶이 시작되는 허벅지 햇살이 내리쬐는 입술 양털 구름 아래 녹색 지대는 순항 중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마지못해 온 파티에서 우울한 한숨을 쉴 때 여인은 천국을 가자 했다 보헤미안 언덕에서 루마니아 여인은 머리를 풀고 야생화를 어지럽혔다 대지는 슬픔을 굴리며 갔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독거노인 - 김익진 오래된 한옥의 한낮이었다 방문을 몇 번 두드려도 정적뿐이다 그녀는 누워있었다 손은 번역할 수 없는 말처럼 떨리고 안부를 묻자 눈가엔 눈물이 고여있었..

한줄 詩 2021.09.02

노을 강 - 육근상

노을 강 - 육근상 눈물은 강물 같아서 슬픔이 울컥 나를 데리고 강으로 간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피 말리게 했는지 미쳐버리게 했는지 흩날리던 꽃잎도 강가에 와서는 또 한 번 뒤척이다 강물 소리로 돌아간다 덩어리째 떨어진 울음도 한쪽 다리 절며 서쪽으로 가고 텅 빈 방에서 노을 강 바라보는데 타다 남은 낮달이 흘러내린 이마가 벌렁거리는 심장이 다하지 못한 말처럼 훌쩍훌쩍 흘러간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새 떼 - 육근상 새 떼 날아오르자 먹감나무 이파리가 꼬리 흔들며 내려 앉았다 마당 켠 가마솥 아궁이로 몰려든 먹감나무 이파리에 눈알 하나하나 붙여주었다 개중 몇몇은 억새 바람에 홀려 호수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봄날 끝자락에 피어 당숙한테 머리끄덩이 잡힌 엄니는 말 한마디..

한줄 詩 2021.09.02

합정동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 있다 - 전장석

합정동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 있다 - 전장석 합정동의 기억은 머물수록 목이 마르다 우기에 편식하던 슬픔이 깊은 우물로 괸 흔적이 있다 갈증 난 길들 마중 나가면 곧 사라지고 꿈속에선 누운 자리마다 물이 스며들어 젖은 이불 한나절씩 말리곤 했지 합정동에서 다시 너를 만나자고 한 건 아주 오래전 그 우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함 물이끼 서늘한 둘레를 퍼올리기 위함 두레박을 다시 내리면 기장 깊고 웅숭한 울림이 한 됫박의 물이어서 어디든 찰랑이며 흘러넘치곤 했지만 조개우물에서 피를 씻어냈다는 후일담에 잠 밖으로 잠은 자주 나와 있고 정류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은 양화진 물살에 잘린 목이 오래 가렵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단 잠두봉에서 두레박을 던져 핏빛 노을을 건져 올린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수색역을..

한줄 詩 2021.09.01

모형 십자가 - 정세훈

모형 십자가 - 정세훈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부활을 기념하는 이들로 북적대는 부활절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볼 모형 십자가를 놓고 누가 지고 갈 것인가 적격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모형 십자가가 지고 가기에 너무 무거워 보이는 이들로 가득한 광장 자신은 적격자가 아니라 한다 서로가 힘이 없다 나이가 많다 지병이 있다며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매미 - 정세훈 단지, 여름 한 철을 울기 위해 땅속 어둠에서 그 오랜 세월을 버티어냈을까 고목 나무 등걸에 앉아 매미가 울고 있다 수년간을 굼벵이로 땅속 어둠에 묻혀 사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기어 나와 허물을 벗는 굳이 집을 짓지 않고 나무 그늘에 사는 인간이 먹는 곡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 맑은 이슬만 먹고 사는 한 역사..

한줄 詩 2021.09.01

그 여름의 끝에서 - 김보일

그 여름의 끝에서 - 김보일 아마도 흐렸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너희들의 윤곽이 어슴푸레해져 너희들의 그림자는 서로를 허락하며 즐겁게 넘나들기도 했지만 후박나무 그늘로 내리는 여름이 하도 성급했으므로 태양은 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분주히 잎새들을 둥글게 키우고 바람은 또 무엇을 기억해 내려는지 미루나무 밑동을 바삐 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아라 여름은 늘 최초의 여름이었으므로 바람은 늘 새벽으로부터 다시 불어 왔으므로 태양과 바람의 기억은 낡고 낡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저녁에 새 이름을 부르러 너희들은 갔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별 - 김보일 목동이 별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자, 스테파네트는 그래, 어쩜, 하면서 맞장구를 쳐 준다. 목동은 신이 나서 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꺼내 놓을 태세..

한줄 詩 2021.08.31

비 오는 날 - 천양희

비 오는 날 - 천양희 하늘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먼저 젖는다 이런 날은 매운맛을 보는 게 상책이다 아귀찜 먹으러 '싱싱식당'엘 간다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입속이 화끈거린다 나에게도 분명 매운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비처럼 젖는 세상의 예사로운 일이여 어떤 것은 눅눅하여 얼룩 된 지 여러날이다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길바닥을 찍고 있다 자전거를 굴리며 소년이 천상병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시인은 죽어 거리를 남겼다 모든 확신은 증오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생(生)의 후반이 우두커니 서 있다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별나지 않은 일에 귀 기울이는 저녁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기를 써야 할 날은 오늘 같은 날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다시 쓰는 사계..

한줄 詩 202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