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합정동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 있다 - 전장석

마루안 2021. 9. 1. 19:35

 

 

합정동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 있다 - 전장석

 

 

합정동의 기억은 머물수록 목이 마르다

우기에 편식하던 슬픔이

깊은 우물로 괸 흔적이 있다

 

갈증 난 길들 마중 나가면 곧 사라지고

꿈속에선 누운 자리마다 물이 스며들어

젖은 이불 한나절씩 말리곤 했지

 

합정동에서 다시 너를 만나자고 한 건

 

아주 오래전 그 우물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함

물이끼 서늘한 둘레를 퍼올리기 위함

 

두레박을 다시 내리면

기장 깊고 웅숭한 울림이 한 됫박의 물이어서

어디든 찰랑이며 흘러넘치곤 했지만

 

조개우물에서 피를 씻어냈다는 후일담에

잠 밖으로 잠은 자주 나와 있고

정류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은

양화진 물살에 잘린 목이 오래 가렵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단 잠두봉에서

두레박을 던져 핏빛 노을을 건져 올린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수색역을 지나며 - 전장석


수색은 내 스무 살 무렵의 간이역

버스가 난지도에서 심하게 울렁거릴 때
세상의 모든 쓰레기가 숨을 쉬고
깨끗한 이별을 위해 
우리는 주저없이 그곳을 통과했지

회색의 역사(驛舍)를 빠져나온 사람들
까만 먼지들로 새처럼 날아가고
새들은
붉은 하늘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비만 오면 온통 물바다라 물빛골마을
가난 때문이 아니라는 듯
작은 상점이며 채소밭이며 골목들이
순순히 물길을 내어주곤 했지 

물이 다시 빠지면 온통 뻘밭이었다
발이 느린 노을이 어기적어기적 빠져나가고
무채색의 달이 밤새 상처를 어루만지면
마지막으로 고향마을을 떠났던 사람들
새 떼가 되어 돌아와 젖은 군무를 펼치곤 했다

물이 빚은 동네, 물의 형상을 기억하느라

아직 물색이 남아 있는 대장간과 이발소와 그리고
몇몇 낡은 입간판들
고속의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수전증(手顫症)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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