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 오는 날 - 천양희

마루안 2021. 8. 31. 22:28

 

 

비 오는 날 - 천양희

 

 

하늘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먼저 젖는다

이런 날은

매운맛을 보는 게 상책이다

 

아귀찜 먹으러 '싱싱식당'엘 간다

손아귀로 아귀를 뜯으면서 생각한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입속이 화끈거린다

 

나에게도 분명

매운 세상이 지나간 것이다

 

비처럼 젖는

세상의 예사로운 일이여

어떤 것은 눅눅하여

얼룩 된 지 여러날이다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길바닥을 찍고 있다

자전거를 굴리며 소년이

천상병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시인은 죽어 거리를 남겼다

 

모든 확신은

증오로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생(生)의 후반이

우두커니 서 있다

 

별나지 않은 사람들의 별나지 않은 일에

귀 기울이는 저녁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기를 써야 할 날은

오늘 같은 날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다시 쓰는 사계(四季) - 천양희

 

 

초록이 조금씩 지쳐가더니

바람의 기색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일은 참 더웠습니다

 

구름이 흩어지는 걸 보니

가을이 가까운 듯

산그늘이 깊어집니다

그늘에 기대어

수고로운 인생이라 쓰고 지웁니다

 

정답 없는 질문에 해는 기울고

사람의 눈이

별빛을 만들기도 합니다

 

안간힘을 인간의 힘이라 하기에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걸

겨우 알았습니다

 

다음날은 노루목에 서서

사람이 많아 잊기도 한 하늘을

오래 바라보기도 하겠습니다

 

사는 일이

거두는 일보다

지독히 다행한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