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마루안 2021. 9. 6. 22:36

 

 

이상하게 그때 - 이기영

 

 

안심이 되었다

 

내게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수록

자꾸 미움에 가닿았다

슬프지 않은데 슬픈 귀 같은 것이 뾰족하게 자라났다

 

지문이 하나씩 사라져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방황이 습관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불쑥, 이라는 말은 어찌나 황홀한지

 

고흐가 제 귀를 잘라 버렸을 때

그걸 종이에 둘둘 말아 여자에게 건넸을 때

그리고 붕대를 감싼 자화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때

 

더 이상 슬픔은 자라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며 돌아서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잠가야 하는 것들과

잠기지 않은 것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지나가는 행인 - 이기영

 

 

그때 이상한 오후를 지나가는 중이었어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

더 높은 곳에 집을 짓는 사람들을 보았지

 

눈보라에 갇혀 사라지고 싶은 이유가 죽음보다 강해져서

붉은 지붕 아래 높고 거룩한 태양이 뜨는 그런 곳이었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었어

 

한 발 앞의 낭떠러지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이었는데도

서럽도록 아름다웠어

아무도 눈물을 닦아 주지 않아

깊고 아득한 절망으로 밤이 오는데도

별은 빛나는

 

나는 지나가는 행인일 뿐이었는데

아름다운 풍경 안의 사람들을 걱정했지

 

안으로 파고드는 날들이 아파서 울음이 흘러넘치지는 않을까

 

그렇게, 조금 걱정하는 척으로 그만인 그런 날이었어 나는 스쳐 지나가면 그만일 뿐이었어

 

내 안의 울음이 곪아 터진 줄을 몰랐어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인생>,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0) 2021.09.07
가을나비 - 박인식  (0) 2021.09.07
햇빛 한 줌 - 이산하  (0) 2021.09.06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0) 2021.09.03
오래도록 - 이기록  (0)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