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에서 - 김보일
아마도 흐렸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너희들의 윤곽이 어슴푸레해져
너희들의 그림자는 서로를 허락하며
즐겁게 넘나들기도 했지만
후박나무 그늘로 내리는
여름이 하도 성급했으므로
태양은 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분주히 잎새들을 둥글게 키우고
바람은 또 무엇을 기억해 내려는지
미루나무 밑동을 바삐 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아라
여름은 늘 최초의 여름이었으므로
바람은 늘 새벽으로부터 다시 불어 왔으므로
태양과 바람의 기억은 낡고
낡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저녁에
새 이름을 부르러 너희들은 갔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별 - 김보일
목동이 별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자, 스테파네트는 그래, 어쩜, 하면서 맞장구를 쳐 준다. 목동은 신이 나서 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꺼내 놓을 태세다.
소녀에게는
소년의 몸에서
우주를 꺼낼 만한 힘이
있다
# 김보일 시인은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17년 <문학과행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살구나무 빵집>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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