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매미, 생은 이제 아름다웠다 - 유기택 드러눕고 싶은 생이 있다 일곱 해를 기다려, 일곱 날을 울었다 일곱의 전생을 건너와 다 살았다 자그마치 염천 칠월 한길로 칠성판을 깔았다 타인의 낯선 죽음에 쉽게 동의했다 산 자들의 슬픔을 장사 지냈던 것 그럴 리 없는 단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날아간 쪽으로 적막한 구멍이 하나 길게 생겨났다 고요를 아물린 정적 빙하 속에 갇힌 공기 한 방울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은 이제 나보다 어리다 벽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이 안 들리는 좀 눕고 싶은 안이 있다 태생이 우발적일 수 없는 총을 오래전부터 손잡이를 아름다운 상아로 장식한 쓸쓸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싶었다 *시집/ 사는 게 다 시지/ 달아실 야화 - 유기택 새벽 한 시, 옆집 시멘트 담장 아래서 사랑 하나가 끝나..

한줄 詩 2021.09.17

영가등 아래 - 김용태

영가등 아래 - 김용태 ​ 살아 마흔두 해, 떠나보낸 일곱 해 어느 한쪽 치우쳐 아리지 않은 적이 있겠느냐 산딸나무꽃 하얗게 뒹구는 해우소 아래 물기 머금은 한지 같은, 노모 위태로이 앉아 있다 어려부터 겁이 많아 울 밖 화장실 가는 것을 겁내하던 모습이 밟힌다며, 삭정이 같은 손 뻗어 극진히 등을 달았다 이젠 그만 죽어, 삼백 예순 날 하루 가슴에서 비워낸 적 없는 새끼를 만나고 싶다고 산새 울음 겹으로 쌓이는 산길 이십 리 모진 명줄처럼 늘어져 있는 밤길 더듬어 울고 갈, 허물어져 떠내려 갈 일만 남은 봄 밤 해우소 환히 밝힌 영가등 밑에 붓꽃 숨죽여 피고 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붉은 귀향 - 김용태 -벌초를 하며 청사포(靑沙浦)의 망부가 그러했듯 꿈도 간절하면 전설이 되..

한줄 詩 2021.09.17

별자리를 보는 방법 - 고태관

별자리를 보는 방법 - 고태관 히말라야를 오르는 셰르파들은 들꽃 냄새로 길을 찾습니다 밤하늘에 매달린 흔들개비를 올려다보느라 멈춰섭니다 갸웃거리는 머리에 뭉뚝한 뿔이 자랐습니다 꽁무니 따라 쫑긋거리던 별이 미끄러져 내립니다 졸다가 깼다가 혀로 코를 적시며 온 길 눈 감고도 아는 길목에서는 입으로 목줄을 끌어당겼습니다 줄 감긴 자국을 핥으며 별똥별의 경로를 새깁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나눠 먹고 나란히 가벼워집니다 함부로 풀을 뜯지 않은 허기 젖은 코를 킁킁거려 갈림길에서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지구는 오른쪽으로 도나요 아니면 왼쪽 지상의 꼭대기에서는 소용없는 일 염소자리 아래 엎드린 길잡이는 나침반으로 떨립니다 점자로 박힌 마을 불빛이 다 꺼진 뒤에야 잠을 청하면 정수리 위에서 북극성이 희미해집니다 우리가 지나..

한줄 詩 2021.09.16

반달의 화법 - 김지명

반달의 화법 - 김지명 맞바꾼 얼굴이 똑같은 반달은 서로를 잉여라고 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생각이 앙상한 이야기를 둘둘 말고 있었다 그날 이후 쉰세 마리 양들은 고목 앞 양편으로 나뉘어 목례를 했다 생각해 주는 말투로 알람으로 목소리 저장해 둘까? 바람과 이파리 부딪쳐 쌈꾼처럼 말을 건네지만 오래 같이 먹는 동네 공기에 서로는 젖고 서로는 젖지 않았다 나는 달을 감아 당신을 풀고 당신은 달을 풀어 나를 감는 상현은 머나먼 진술로 기밀을 담보했다 힘들어를 괜찮아로 발음하는 자간(字間)의 웃음 밤낮 인생은 그래 그래? 화법 하던 말을 끄고 잠든 마을 보며 볼 게 참 많다? 세상에서 빌린 말을 던지며 별똥별이 사라졌다 먹장구름이 반달을 뱉어 놓으면 편파는 하현에서 미끄러졌다 *시집/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한줄 詩 2021.09.15

천박한 사랑에 관하여 - 서윤후

천박한 사랑에 관하여 - 서윤후 아내는 내게 오라고 하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것이 침대 귀퉁이만 돌아도 갈 수 있는 일인지, 맨발로 유리 조각을 지나야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남았고 나는 숲에 불을 지른 것 같다 불이 끝나는 쪽으로 향하기 위하여 마주댄 것이 많아 타오르기가 쉬웠다 그 숲에서 아내는 물을 심어둔 것 같다 괘종시계 앞에서 불확실한 것과 손에 쥔 영수증 앞에서 불투명한 것이 우리를 각각 다른 곳으로 불러냈다 사랑을 멀리하라는 신의 계시였고 거역했지만 나와 아내는 거의 동시에 제 발로 사랑을 빠져나왔다 살려달라는 말을 둘째 아이처럼 낳고 아픈 사람에게는 가고 싶거든, 첫차든 막차든 빨리 가야만 한다는 이 심정을 해치우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야채죽의 당근을 ..

한줄 詩 2021.09.12

바라보기 - 진창윤

바라보기 - 진창윤 바스락거린다, 발을 떼어내지 못한 만큼 간절하다 질긴 저녁이 밀려오면 사람들은 저마다 침대로 돌아가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밤 아닌 밤, 혼자 먹는 사료는 차다 늦은 밥을 먹으며, 오독오독 읽는 세상, 달랑 하나뿐인 접시 위에 놓인 발톱을 혀로 다듬는다, 아직 식지 않은 야생을 식힌다 접시가 맑아지면 차가운 방바닥의 끝에서 닳아버린 장판을 이빨로 핥는다 똑바 바라본 적 없는 내 눈동자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저 눈빛,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길들여진다 길게 바라보면 방문이 열린다 손대지 않고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시집/ 달 칼라 현상소/ 여우난골 달 칼라 현상소 - 진창윤 해가 지면 남자는 달을 줍는다 오래전부터 혼자 사는 남자는 사진 박는 것이 직업이다 가로등 아래 골..

한줄 詩 2021.09.12

무반주행성으로 나는 - 이자규

무반주행성으로 나는 - 이자규 담벼락에 기대 그를 기다렸다 벽이 된 구조와 생태가 들려왔고 잠시 멍해졌고 내 속의 풍화작용을 메모하다 눈이 젖어오고 돌 속으로 들었다 함박눈으로 말한다 그는 척추를 세우라 한다 그는 15도를 연주하다 파도를 잡아 앉힌다 퇴적층에 리아스식 해변을 왔다 파닥이는 물고기를 음각하는 고요한 길목이다 하얀 돌을 으깨 먹는 바다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가엽고도 가여운 그가 중풍 든 노모를 업고 들어가 물장구 치는 무늬는 돌의 어느 쪽인지 제 안의 썩고 있는 지느러미의 보검이 내 등에 꽂히는 화살 아니었을까 그는 오지 않았고 기다림의 이명은 돌의 흡반으로 갔다 함박눈이 피려는 모과꽃눈 나무에 넣어주더라도 눈물은 흘러 요철식의 공법으로 그가 쌓이고 하얗게 숨은 담벼락이라는 것 할 말 ..

한줄 詩 2021.09.12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강에서 바닷고기의 비린내가 온다 어둠 깔리는 수산시장이 생선의 배를 갈라 새끼의 배를 불리는 사내들 악다구니로 끓는다 보기에도 현란한 사시미칼 서슬 아래 펄떡이는 생명 내장 쏟으며 쓰러지지만 서른아홉 대머리 박씨에겐 죄가 없고 죄 없으니 은나라 주왕도 안 무섭다 허풍과 농지거리 섞어 서푼짜리 생 헐값 떨이에 거래하는 고무장화의 거친 사내들 파르르 떨어대는 넙치 아가미에선 '과르니에리 델 제수' 소리가 난다 그래, 오늘만 같다면 이번 달 딸아이 레슨비는 걱정 턴다 새까만 박씨 낯짝 전갱이 굵은 비늘이 빛난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대게잡이 선원 철구 씨 - 홍성식 당 45세 철구 씨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 여기서 구하지 못한 아내 거기라고 쉬이 찾아질까 성..

한줄 詩 2021.09.11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우리가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외지고 혹독해진다면 저 높이는 흉측한 돌일 뿐이지 거기서 우리 중 한 사람이 몹시 울어야 한다면 천 길 깊이는 나쁜 신념일 뿐이지 제발 희생을 실천해주세요 아찔함을 뛰어내려주세요 불처럼 단단한 눈물이 되어볼 걸 해뜨기 전에 길을 나선 내상(內傷)이 피운 우리는 문득 몰매처럼 서러운 불안의 아들딸 그러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번 생의 경사는 낡은 슬리퍼처럼 헐떡이지 우리를 보다가 우리만 보다가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잠깐의 미망이 닿지 않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꽃, 꽃을 지켜보는 난폭 여긴 뜨겁고 좁은 맹지가 될까 우리 몰래 갈라 터진 몸을 실천해주세요 헛꽃의 걸음이 더딘들 멈추지 말아 주세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우린 방자한 기백인 걸요 아슬하고 비범..

한줄 詩 2021.09.11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차꽃 앞에 놓는다 - 박남준 겸손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꽃이 있다 순결하다는 말이 그 곁에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배어 있는 꽃이 있다 그리하여 곱기도 곱구나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아미 숙인 수줍음이 뒤따라 나오는 꽃이 있다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떨림 같은 꽃이라니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을까 꼭 그만큼 숨은 듯 다소곳이 너는 피었구나 그윽하여라 첫눈처럼 내렸구나 꽃송이 눈꽃송이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소담하게도 너는 피어나서 달빛과 별의 향기 길어 올렸으리 서리서리 서리를 펼쳐 놓는 밤이나 날리는 눈보라 아랑곳하지 않다니 고요하여라 세상의 단아하고 고혹한 시어들을 노란 가을 햇살의 꽃술 속에 안고 품었구나 일찍이 어떤 꽃의 수사가 하마 이러할까 네 앞에 나를 기꺼이 내어놓는다 *시..

한줄 詩 2021.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