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마루안 2021. 9. 2. 21:56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 김익진

 

 

혀 아래 작별을 숨긴 채

러시아의 목각 인형처럼

푸른 색조의 미소로

댐 같은 자비를 찾아 떠났다

 

보헤미안 언덕에

풍성하게 늘어뜨린 원피스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걷자고 해서

스스럼없이 걸었다

 

삶이 시작되는 허벅지

햇살이 내리쬐는 입술

양털 구름 아래

녹색 지대는 순항 중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마지못해 온 파티에서

우울한 한숨을 쉴 때

여인은 천국을 가자 했다

 

보헤미안 언덕에서

루마니아 여인은 머리를 풀고

야생화를 어지럽혔다

대지는 슬픔을 굴리며 갔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독거노인 - 김익진

 

 

오래된 한옥의 한낮이었다 방문을 몇 번 두드려도 정적뿐이다 그녀는 누워있었다 손은 번역할 수 없는 말처럼 떨리고 안부를 묻자 눈가엔 눈물이 고여있었다 우리는 반찬을 갖고 왔다고 했다 그녀는 지난주에 받은 그릇을 주기 위해 싱크대를 잡고 부엌으로 갔다 한 발 한 발 옆으로 걸었다 며칠 밥을 안 먹은 듯 남은 반찬을 다 비운 후에야 떨리는 손으로 설거지를 했다 준비해 간 커피를 따라준다

 

"나는 노란색을 좋아해요"

 

방에서 보는 노을이 좋다고 했다 그녀는 물어보지도 않은, 자식들이 가끔 들여다본다며 먼지 쌓인 음료수를 주었다 몸에선 담즙과 신 냄새가 났고 가슴은 마른 화산재 같았다

 

배웅하던 그녀는

손을

잡아달라고 했다

 

 

 

 

# 김익진 시인은 경기도 가평 출생으로 독일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2007년 <월간 조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회전하는 직선>, <중력의 상실>, <기하학적 고독> 등이 있다. 현재 한서대 항공신소재공학과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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