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가난의 잉여 - 조기조

가난의 잉여 - 조기조 중년이 되면서 연이어 허리띠 구멍을 늘이고 목 단추를 끼우기 힘들 정도로 군살이 늘어 은근히 걱정이다 살아오는 내내 가난했는데 중년에 느는 군살을 보며 필요한 양보다 많이 먹은 몸을 보며 가난조차 잉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고도 남는 것을 위해 싸우지 말자던 생각이나 미래를 위해 쌓아두지 말자던 거침없는 주장을 되새김질한다 가난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잉여가 똑바로 걷고자 해도 뒤뚱거리게 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욕망의 무게 - 조기조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무언가를 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동기간도 일부러 덜 만났다 시위가 있는 광장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서성이거나 글쟁이들과 될수록 어울리지 않았다 혹하지 않아야 한다는 나이..

한줄 詩 2021.09.26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그 나이쯤 되면 - 최준 아닌지, 문득 곁눈질로라도 어둠이 그리우면 몸이 쇠했다는 증거 누구나 그 나이쯤 되면 혼자 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만큼 했으면 싸움질도 싫증이 나고 거친 숨과 뜨거운 몸도 식힐 줄 알지 않는가 열어놓은 마음 문틈으로 얼비치는 죽음 그림자 그걸 모시느라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는가 고통하며 세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세월 속에 무너내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가 누구나 그런 죽음의 몸종으로 한세상 살아왔음을 아는 것 아닌가 길은 늘 생애보다 길게 마련인 것 그 길 도중에서 나 죽으면 눈 귀 어두워지면 남겨진 길로는 몸 떠난 마음만 갈 일인 것을 마음만 자욱히 운무에 헤매일 것을 그런 어둠 속으로 몸 끄느라 지친 마음만 죽음을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을, 그런 때 곁을 질러가는 ..

한줄 詩 2021.09.23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무화과 피던 자리 - 이문희 나무가 앓기 시작했다 남자는 야반도주를 하고 여자가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무화과 이파리가 온 마당을 훑고 다녔다 우편함의 소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확성기 소리를 몰고 다니던 트럭이 매일 오는 장이 아니라고 생선 비린내 진을 치고 채소가 떨이로 목청 돋워도 유학 간 딸아이의 혼령이 스타인웨이를 타고 흐르고 검은 정장의 사내들 레드카드로 경고하는 집 열리지 않았던 파란 철문을 연 건 영구차였다 액자 밖의 사람들 몇은 담장에 기대 숨죽였고 정원은 말라갔다 막 맺기 시작한 무화가 열매가 장례행렬 속으로 떨어지던 오후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한국문연 칸나가 저녁 문턱을 넘는 풍경 - 이문희 칸나가 피었는데 우린 왜 쓸쓸하죠? 시골 간이역 근처 허름한 여인숙 마당엔..

한줄 詩 2021.09.22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추석을 배달하는 퀵서비스 맨 - 주창윤 배달이 밀리는 추석이다. 퀵서비스 맨이 갈비 세트와 특상(特上) 나주배 상자와 양주병을 가득 싣고 질주한다. 그의 어깨 너머 추석 보름달이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짓누른다. 특상 나주배 같은 달의 무게가 중심을 잃게 만들었나? 사거리에서 넘어진 오토바이 바퀴는 계속해서 헛돌고 쓰러진 퀵서비스 맨은 일어나지 못한다. 깨진 양주병에서 터진 보름달이 흘러내려 아스팔트를 적신다. 달은 그렇게 노랗게 흘러내리고 있다. *시집/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그리운 은하수 목욕탕 - 주창윤 중계동 한화꿈에그린 아파트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걸어가면 빌라와 주택들 사이 은하수 목욕탕이 있다. 몇 달 만에 갔더니 사라졌다. 격포에 가서,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낸 ..

한줄 詩 2021.09.22

바람의 변주 - 하외숙

바람의 변주 - 하외숙 먼저 말 걸어오는 바람을 좋아하나요? 뿌리도 없는 것들이 어찌 천 년을 사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길들여지지도 않는 수많은 바람의 길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림자로 따라다니다 어두운 밤길 달리면서도 멈출 수 없는 태풍처럼 심장을 관통하고 떠나는 바람의 등 창문을 열고 구월의 달력을 넘기자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펄럭임 굳은 언약도 무의미해지는 순간, 바람이라 했네 깊이를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은 한 순간이었던가 수시로 베갯머리 파고드는 달뜬 몸살은 풍로의 바람처럼 활활 타올라 당신이 아니었다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을 꿈결에 일어나 흐느끼는 바람을 본 적 있나요? *시집/ 그녀의 머릿속은 자주 그믐이었다/ 시와반시 바람의 가출 - 하외숙 ​ 며칠 잠잠한가 하더니 바람..

한줄 詩 2021.09.22

자화상 - 황중하

자화상 - 황중하 나는 불행했고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내가 그린 나의 얼굴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여러 겹 덧대어 그린 불안한 선들과 우울한 형태들 ​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은 언제나 스케치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황홀한 진실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 세상은 나를 향해 열려 있지만 늘 깜깜했다. ​ 어둠 속에 추락한다. 상처 입은 채 깨어난다. ​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도화지 속 나의 얼굴 ​ 그것은 내가 그린 타인의 거짓말 처음부터 나의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시집/ 나는 아직 당신을 처리중입니다/ 문학의전당 빗방울 - 황중하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에 뚫고 들..

한줄 詩 2021.09.19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달의 백서 1 - 이문재 -그래서 달은 둥글어진다 지금 저기 ..

한줄 詩 2021.09.19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저문 들녘의 꽃들을 위하여 - 박남원 꽃들이 핀 저문 들녘에 서면 바람은 시든 추억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젊은 날 꿈을 찾아 멀리 날아갔던 새들은 기억조차 가물거리고 나는 저문 들녘의 꽃길을 걷는다. 대낮부터 햇빛과 흰 구름과 따듯한 공기에 한껏 향연을 베풀다가는 어둠이 온 무렵에서야 겨우 꽃들은 자신의 길을 내게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짓을 받아들인다. 아쩌면 지금 저 꽃들은 나보다 더 슬픈 기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마을 귀퉁이에선 언제나 푸른 꿈들이 어둠 속에 저물어가고 한 모금 목마름의 물조차 야속했던 혹은 운명과도 같은 시간들. 그래서 꽃은 미처 꽃이 되지 못한 것들에게 조그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에 환한 것들은 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쯤 아픈 ..

한줄 詩 2021.09.18

물망초 - 윤의섭

물망초 - 윤의섭 제자리에 떠 있는 새는 바람과 맞서는 중이다 다른 항로는 없다 새는 지금 충분히 무겁다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입니다 물망초 우리 일생이 그런 거죠 안 그러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얘기를 들으면서 한참을 머물렀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에 대한 기억이 쌓이는 건지 희미해지는 건지 언제부터 이 산책을 나섰는지 떠오르지 않아 깨고 나면 잊힐 게 분명한 생시였다 지난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므로 구릉으로부터 바람이 밀려온다 나무들의 지붕이 쓸리고 뒤따라 노을구름과의 꼬리가 흩어진다 걷는 게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이 생이란 지워지지 않은 네 생각들로 가볍지 않다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애사 - 윤의섭 내가 꾸는 가장 긴 꿈은 너와의 일초에 대해서일 것이다 ..

한줄 詩 2021.09.18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오늘의 안부 - 김가령 전봇대 뒤쪽 얼었던 금 간 벽이 열린다 노릿한 오후가 가만 가만 속살을 드러낸다 몇 개의 본색이 톡 톡톡, 터진다 나를 향해 건너온다 너무 많은 노랑들이 포개져 틈에서 바깥으로 새로 돋은 꽃잎들이 안쪽을 들키고 싶은 마음에 젖는다 벌들이 꽃 뒤로 사라진다 쉿, 이별하지 못하겠다 한겨울에 핀 개나리처럼 추웠던 날이 있었지 오랫동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소한 입술마저 지우고 냉정하게 괜찮은 척, 해야만 했지 누군가에게 수신 거부된 사람처럼 나는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단 한 번도 노랑을 배반해본 적 없는 개나리는 확고하다 봄까진 아프지 말라고 떼로 피는 것 같다 오늘부터 안부는 온화하고 간지럼은 부드럽다 *시집/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었다/ 문학의전당 너에게 붙여준 꽃말은 미혹이..

한줄 詩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