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빛 한 줌 - 이산하

마루안 2021. 9. 6. 22:20

 

 

햇빛 한 줌 - 이산하


그는 사형수로 3년 6개월을 살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사형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고
무기수 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좁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날 그는 무심코 자기 무릎 위의 햇빛을 보았다.
북서향의 독방에 두 시간쯤 가만히 머물다 떠났다.
날마다 눈꺼풀 같은 창문으로 스며든 시한부 햇빛
그 햇빛이 무릎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을 때가
마치 어린 딸이라도 보듯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이 햇빛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햇빛은 또 찾아와 가만히 머물다 떠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수시로 찾아온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날마다 무릎 위에 눈물방울처럼 맺혀 고요히 반짝이던
두 시간짜리 한 줌 햇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겨울 폭포 - 이산하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팎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그러나 던져지면서도
폭포는 왜 정점에서 자신을 꺾는지
자신을 꺾어 왜 단숨에 비약하는지
물이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내 눈과 내 귀의 모호한 결탁임을 
그것이 마침내 공포에 떠는 내 헛것의 정체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폭포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치며 하나로 체결되는 것이다.

 

 


# 이산하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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