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밑줄을 왜 긋느냐고 묻는 아이야 - 안태현

밑줄을 왜 긋느냐고 묻는 아이야 - 안태현 내 가방엔 매일 빵과 달팽이와 알약과 술병이 넘친다 잘 닦인 거울처럼 비춰보고 싶은 것들이 넘칠 때가 있다 사랑니든 실핏줄이든 무엇보다 네가 왜 있느냐고 물었던 내 이마의 주름에 안개꽃이 지나갈 때 생각의 숲에 들어가 처음 보는 새의 가장 맑고 고운 목소리를 보란 듯이 찜해둔다 이만큼 왔으니 내 삶의 태반은 눈 둘 곳 없는 기다림이었으므로 어디 밑줄 하나 남아 있을까 자작나무 하얀 목덜미 같은 고백 한 구절 누구든 집어가라고 꺼내놓을 수 있을까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어딘지 모를 지금에 이르러 사랑을 잃어버리고 뒤돌아보는 법도 잊어버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밤이다 가끔 어둡게 걸었던 길이나 떠올리면서 생각을 ..

한줄 詩 2021.09.10

실면증 - 손병걸

실면증 - 손병걸 견디다 못해 늦은 밤 손전화기를 든다 숫자를 누른다 접속에 실패하는 깊은 밤마다 오히려 당신 쪽으로 나는 함께 걷던 적확한 주파수를 맞춘다 칠흑의 새벽이 여명에 이를 즈음 나는 고칠 수 없는 습관을 절망하며 창 너머 하늘 깊숙이 응시한 붉어진 눈길을 문 쪽으로 겨눈다 또다시 방문을 활짝 열고 허겁지겁 신발 끈을 묶듯 억제할 수 없는 발끝이 손끝처럼 불안불안 당신을 찾아 나선다 의연한 표정 속에 통증을 잘 감추고 정말 괜찮은 안녕이었다는 말 기꺼이 웃으며 돌아섰다는 말 그 말들은 다 거짓말 흘러간다는 시간이 되레 싸여 있듯 이별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몸의 거리일 뿐 그리움은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충분히 읊어도 잠을 잃어도 더 많이 아파해도 괜찮다 죽음조차 헤어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

한줄 詩 2021.09.10

일일 연속극 - 김해동

일일 연속극 - 김해동 일일 연속극을 보면서 견딘다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비디오테잎으로 장식장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분량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함께 울고 웃었다 때로는 기가 차서 억울해 하면서 "저것 다 연기야"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허위로 가득 찬 세상 재생하여 반복되어도 눈 뜨면 사라지는 안개 속이다 일일 연속극을 기다리면서 드라마 같은 또 하루를 견딘다 종방 어디쯤 덧니처럼 튀어나온 버들강아지 가늘고 긴 물관이 터져 내 봄도 언제쯤 활짝 피어나겠지 *시집/ 칼을 갈아 주는 남자/ 순수문학 패티 김 - 김해동 칠십오 세에 하이힐 신고 블루진 입고 포즈를 취한 디바 해는 뜰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고 황혼을 불러 노래한다 봄날부터 꽃 안개로 물들이며 연인들이 가야 할 길을 빛과 그림자로..

한줄 詩 2021.09.09

나를 미는 의문 - 서상만

나를 미는 의문 - 서상만 -작심 3 그래, 올 그믐을 넘기면 나 몇 살이지 오늘 이 노을 내일 저 바람 따라가며 무명에 잠들지 못하고 침침한 눈까지 가납하며 나잇살로 버티는 우련 내 속내가 뭣인가 무늬도 향기도 날아간 하구의 망부석처럼 망가지고 일그러진 고독 발동선 한 척 얻어 타고 나, 이제 분월포에 가서 흔들의자에 잠길까 보다 *시집/ 그런 날 있었으면/ 책만드는집 하늘은 - 서상만 사람들은 왜 하늘을 우러르고 원망하고 빌고 탄식하는지 시원의 나라, 그곳은 언젠가 우리들 돌아가야 할 곳 하느님은 해결사, 갠 날은 태양을 흐린 날은 눈물로 비 뿌리며 피눈물보다 더 맑고 냉정한 백설 생피 같은 먼동과 노을을 차려놓고 이 세상과 대면하고 있다 오늘 밤 나의 소원은 별에 지는 것 '나, 별무리 따라 빙빙 ..

한줄 詩 2021.09.09

흰머리 진행 경위서 - 이송우

흰머리 진행 경위서 - 이송우 한 놈을 뽑으면 여럿이 솟았다 엄마의 머릿속 새치는 솎아내도 늘기만 하였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좋아 더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도대체 그는 언제쯤 엄마 새치를 뽑아 줄 것인가 내 어린 무릎에 놓인 엄마 머리는 무거웠다 심통이 날 때면 나는 여럿을 잡아 뽑았다 아버지 없는 나, 엉터리로 뽑은 새치 때문에 백발이 된 울 엄마 사랑하는 박인순 선생님 그대여 내 새치를 뽑지 마시게 이것이 단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은 내 흰머리, 더딘 진행 경위서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실천문학사 수면 장애 - 이송우 비 그친 오후 청파동 길바닥 돌맹이처럼 굴러다니는 사람들 저 감은 눈과 벌린 입속에서 나는 잠을 잔다 키우던 개를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때려잡던 복날 어른들처럼 순해진 ..

한줄 詩 2021.09.08

흘러간 그 노래 - 차영호

흘러간 그 노래 - 차영호 너는 그리움 분무기 저무는 하늘에 이내를 갈아 곱게 뿌리고 저 멀리 산그늘 밑으로는 잔별가루를 솔솔 어린 내가 장고개 외딴집 사랑에 살 때 모기장 속에 뿜겨오던 촘촘한 저녁의 입자와 같이 푸른 땀내 날리며 소행성 틈새 비집고 카이퍼 벨트를 내닫고 있는 말발굽들 그리움은 먼저 길 떠난 별들의 갈기 고요한 베어링 속에 살면서 베어링보다 바삐 나부대는 쇠구슬 늘 내 입안을 맴돌면서도 나랑 공범이기를 부정하며 흘러만 가는 그대여 그 곡조 웅얼거리기는 가없는 우주에 좌르륵좌르륵 무궁동(無窮動)의 쇠구슬 쏟기 *시집/ 목성에서 말타기/ 도서출판 움 착화탄(着火炭) - 차영호 나는 밑천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잘 판을 벌리곤 하지 사랑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지 않고 덥석 미끼를 물고 ..

한줄 詩 2021.09.08

말씀과 삶 -박민혁

말씀과 삶 -박민혁 요구하지 않은 기도는 하지 말아줄래요. 나의 믿음은 도식적이어서요. 많은 이웃을 사랑했어요. 양쪽 뺨 정도는 마음껏 내줄 수 있지요. 성애도 사랑이니까요.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요? 예쁜 슬픔 한 조각이 갖고 싶을 뿐이에요. 일생을 학예회처럼 살고 싶지는 않네요. 어린이를 연기하는 어린이는 끔찍하죠. 칠 흙 같은 밤에는 차라리 하늘을 보고 걷듯, 내 기도는 지속되지만 아멘을 발음할 땐 신중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절망은 내 탓이 아니죠. 비극은 생의 못된 버릇 같은 거니까. 강대상 뒤에는 당신 몸에 꼭 맞는 침대 걸려 있는데 아버지, 외박이 잦네요. 남을 미워하는 건 이젠 관두기로 했어요. 내 온실 속에는 꽃 피우는 고통만 들이기로. 통증 없는 삶은 결코 범사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플..

한줄 詩 2021.09.08

삼대 - 이문재

삼대 - 이문재 -미래를 미래에게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탔다 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가 많이 나는 먼 사막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다 만들어서 썼지만 아들인 나는 다 사다 쓴다 내 아들은 내가 번 돈으로 다 사서 쓰다 말고 다 갖다 버린다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다 만들어서 써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다 모래언덕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에서 석유를 파내는 것과 황해 바다를 메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덕분에 사막의 아들딸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아들딸도 차를 몰지만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모는 아들딸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모든 아버지가 아들딸의 미래를 끊임없..

한줄 詩 2021.09.07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서 - 허문태 늦여름 후박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늘어진 오후가 팽팽히 힘을 모은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오르가즘인지 오르가슴인지. 그 '오르가즘이 끝난 여름' 앞뒤로 몇 줄 문장을 만들어 끌고 가면 시가 될 것 같다. 오르가즘에 비유로 꽁꽁 묶어 앞으로 끌어 봐도 여름에 메타포를 걸어 뒤로 당겨 봐도 꼼짝하지 않는다. 따끔! 손보다 몸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티끌만한 개미가 발목을 물었다. 날 제 먹이로 생각하고 끌고 갈 모양이다. 무모함도 모르는 티끌 같은 녀석. 어! 개미 녀석 콧노래를 부르며 나를 끌고 간다. 옆에 있는 친구와 깔깔거리며 제 굴로 끌고 간다. 까맣게 탄 티끌만 한 녀석 여름의 절정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저리 힘이 세졌을까. 친구..

한줄 詩 2021.09.07

가을나비 - 박인식

가을나비 - 박인식 깊고 푸른 투명 너울대는 한 날개 한 날개마다 하늘 마디 꺾였다 휘고 흰 마디 다시 꺾이면 푸르고 깊은 슬픔이 아름다움을 가두네 아름다움도 저리 지독해지면 지독한 사랑처럼 수인(囚人)이 되고 마는가 매혹에 갇혀 입술 떨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열지 못하는 낮달 못 본 척 가을나비 한 마리 하늘 마디 접었다 폈다 폈다 접었다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언어물리학개론 - 박인식 -늘그막 늘그막이라는 말의 운율에서 그늘을 읽는 저녁 어슴프레 구겨지고 주름지는 언어물리학의 잔상들은 어떤 체념의 늘그막인가 동녘에 눈부시던 수사학 서녘으로 기운 지 오래 내 말의 움막에 그늘지는 이 초라한 문장은 얼마나 뜨겁던 격정의 늘그막인가 # 작가 박인식은 195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나무에게 ..

한줄 詩 2021.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