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혼자와 그 적들 - 이문재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고마운 분들 고마워서 미안한 분들 생각할수록 고약해지는 놈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부르지 않았는데 다들 와서 왁자지껄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잘못한 게 없다며 치고받기도 했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우리의 혼자 - 이문재 혼자는 바쁩니다 외롭거나 쓸쓸할 겨를이 없습니다 혼자는 오늘도 모든 걸 혼자서 다 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전기밥솥 예약 버튼을 눌러놓지 않는 것도 옛 애인 이름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

한줄 詩 2021.08.16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 전장석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 전장석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죽음은 골방에서 사흘 만에야 꺼내졌다 이웃집 할머니의 말이 적중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잠든 척하며 119차에 실리기 전까지 죽음은 가장 평온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 틀니를 물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설자가 얼굴을 쓰다듬자 식은 손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심할 여지없는 자연사라며 구급대원들은 시신을 재빨리 수거하였다 가족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목격자들이 유가족이 될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길 꼭대기 삶이었다니 이제 길을 내려가야 하지만 팽팽한 곳을 향해 그는 처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딱 한 번만! 하고 눈 뜨려다 내려가는 길을 보고 안심한 눈을 다시 감았다 *시집/ 서..

한줄 詩 2021.08.12

사소한 자유 - 이송우

사소한 자유 - 이송우 눈발 옆으로 날리는 비로봉에서 땀에 젖은 안경은 불투명 얼음 조각이 된다 동여맨 얼굴 틈을 기어이 뚫는 눈썹까지 허연 바람에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렵다 두터운 방한 장갑 속 손가락마저 얼리는 소백 칼바람 앞에 버프를 내리고 말할 용기가 없다 볼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이 사소한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가 말할 수 있다 아니, 다르게 말할 수 있다 공기처럼 가벼운 이 자유가 얼마나 컸던 것인가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실천문학사 옐로우 콤플렉스- 이송우 아니오, 나는 모릅니다 오빠 대신 여순 부역자로 총살당한 스무 살 여인의 노래, 구례 산수유를 산수유는 유채꽃을 닮았고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 어제 내린 춘삼월 폭설에 만복대 하얀 턱수염을 보았습니다 봄꽃 만발한 서시천..

한줄 詩 2021.08.12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내가 되지 않는 것들 - 서윤후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흘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

한줄 詩 2021.08.11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벽오동 심은 뜻은 - 이산하 처음 강을 건너갈 때 나는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깊이가 내 눈의 깊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수심이 얼마나 되든 끝까지 가본 자만이 가장 늦게 돌아온다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 강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늙은 벽오동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가지 위에는 일생 동안 부화할 때와 죽을 때만 무릎을 꺾는다는 백조 한 마리가 살며 생채기마다 부지런히 단청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허기지도록 적막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강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또 백조가 왜 벽오동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삶의 무게가 조금씩 수심에 가까워질수록 수면 위에서 반짝이고 있을 내 여생의 무늬가 강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며 단청이라도 한다면 내 비록 끝내 바닥에..

한줄 詩 2021.08.11

밑장 - 권상진

밑장 - 권상진 기회는 언제나 뒤집어진 채로 온다 공평이란 바로 이런 것 이 판에 들면 잘 섞어진 기회를 정확한 순서에 받을 수 있겠지 그래, 사는 일이란 쪼는 맛 딜러는 펼쳐놓은 이력서를 쓰윽 훑어보고 몇 장의 질문들을 능숙하게 돌린다 손에 쥔 패와 돌아오는 패는 일치되지 않는 무늬와 숫자로 모여들던 가족들의 저녁 표정 같았지만 여기서 덮을 수는 없는 일 비밀스레 돌아오는 마지막 패에는 섞이듯 섞이지 않는 카드가 있었고 꾼들은 그걸 밑장이라 불렀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밑장을 빼내 옆자리에 쓸쩍 밀어줄 때, 딜러의 음흉한 표정이 밑장의 뒷면에 슬쩍 비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도록 판은 계속된다 어제 함께 국밥을 말아먹고 헤어졌던 이들이 더러는 있고 한둘은 보이지 않는 새 판에서 겨우내 패를 덮고 있던 나무..

한줄 詩 2021.08.10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출렁이는 사막 - 이기록 고백처럼 날 것의 유목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찬을 기다리며 고개 숙이고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새기지 않은 문신만 탁자 위에 남았답니다 두 발로 선 적 없는 매일매일 기억하는 일에 그만큼의 잔이 필요한 것은 꼬리를 잃어버린 어제 때문입니다 코가 간질간질한 밤엔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수 있을까요 철거된 그림자가 웅크린 채 깨어나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조한 이름들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눈을 들기 시작하지요 뻗어가는 시간을 주워들면 사라진 말은 습하지만 마른 것은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을 깨물면 부두교의 주문처럼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는 피가 납니다 마른 가슴만 차오르는 날들입니다 감당..

한줄 詩 2021.08.10

시소 - 권수진

시소 - 권수진 내가 바닥을 치는 순간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가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것처럼 늘 서로의 균형점을 맞추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수평적 사이가 아니란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 서로 얼굴 마주 보며 대면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지 농담을 주고받는 거리는 아니었어 때론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어 사람과 사람 사이 살면서 엎치락뒤치락해도 이렇게 엇갈린 경우는 없었으니까 해맑게 뛰어놀던 아이들 하나둘씩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놀이터에서 너와 단둘이 남던 어느 날 어색한 기운이 주변을 맴도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 같았어 해 질 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한..

한줄 詩 2021.08.09

유산 - 조기조

유산 - 조기조 그는 오랫동안 나사를 박았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단단한 결속을 꿈꾸는 나사를 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힘껏 박고 돌리고 조여도 어느새 슬그머니 풀려버리던 나사 나사를 박다 풀려버린 그의 몸에도 나사 몇 개를 박아 넣었다 목뼈 한 토막을 잘라내고 세 마디를 한 토막으로 고정시켰다 그 나사들이 풀릴 때 그의 몸이 한줌 재로 바뀔 때 누군가 옆에 있게 된다면 이런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나사를 몇 개를 남기고 갔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 조기조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결할 수 없는 곤란에 부딪힐 때 당신은 기술자를 찾는다 컴퓨터가 고장일 때 보일러가 자동차가 멈췄을 때 당신은 기술자를 부른다 기술..

한줄 詩 2021.08.08

21세기 벽암록(碧巖錄) - 최준

21세기 벽암록(碧巖錄) - 최준 자신(自信)을 못 믿는데 어디서 자신(自身)을 찾겠나 청사(廳舍)와 의사당(議事堂)의 부조리나 채굴하려다 속아온 길 구만리(九萬里) 날마다 수염을 깎고 베고 잤던 무릎에다 대못을 치네 저를 잃어버리고도 저리 말짱한 물그림자에게 만이라도 제대로 보이고 싶어서 천년 바람의 가야금 줄도 실은 몹쓸 인종사(人種史)처럼 소용없는 것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고백하라면 한나절은 말할 수 있지 그게 설혹 구만리 허황일지라도 변명이란, 나를 속여 온 나의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칠 얘기 아직은 멀쩡한 두 주먹으로 머리 쥐어박으며 걸어가다 옛 스승들처럼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해도 세간에서의 울화를 어찌 우화(寓話)였다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 나를 지나오고 있던 나를 눈 뜨면 솟아 있는 백척간두..

한줄 詩 202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