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마루안 2021. 9. 3. 22:45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집/ 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


 

 

 

 

빛나는 책 - 박현수
-스마트 폰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
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
거룩한 이론에서부터
가벼운 하소연까지
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
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
사고전서의 서적을 다 넣어도
오히려 자리가 남는 얇은 책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어른에서부터 아이까지

수불석권(手不釋卷), 한시도 놓지 않는다

스스로 빛나지 않는,
그래서 읽는 이의 내면에서
빛을 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책을 들고 나는 흔들린다
황혼을 가로질러 지하철은 터널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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