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여름 꿈 한 토막 - 정충화

여름 꿈 한 토막 - 정충화 나는 외가의 토방 아래 놓인 대나무 평상에 누워 어둠에 물들고 있다 마당을 기웃거리던 별 한 무더기 돌배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모깃불 연기에 눈을 끔벅거린다 외할머니의 곰방대에서 이따금 반딧불이 날아오르면, 뒤이어 해수 기침이 밤의 흉부를 찢는다 가뭄처럼 갈라진 기침소리에 덩달아 숨이 차 눈을 뜬다 나는 시간의 둑 너머 내 집 거실의 대나무 돗자리 위에 구겨져 있다 곁에선 긴 노동에 지친 선풍기가 더운 입김을 내뿜고 테레비는 혼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시집, 누군가의 배후, 문학의전당 팔월 이십 일 진료기록 - 정충화 위장병이 고리가 되어 일 년 넘게 만나는 명동내과 원장에게 나는 보름에 한 번꼴로 정신 감정을 받는다 뱃속을 찌르는 것은 병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야 마음을 ..

한줄 詩 2018.08.18

지상의 방 한 칸 - 이강산

지상의 방 한 칸 - 이강산 -집 지상의 방 한 칸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밤 그들이 맞이할 꿈조차 때때로 방 한 칸 마련 못하고 떠돌아다녔음을 안다 살얼음의 겨울밤부터 한여름까지 내 젊은 여행의 시절을 던져버린 탄광지대 꼬막껍질 같은 사택촌 똥골의 아내들이 새벽마다 태백선 비둘기호를 오르내리며 생선광주리나 옥수수다발로 쌓고 또 쌓아 이룬 검정 가슴 그 앙가슴 열면 잔잔히 고여 있을 한 칸의 방 아니면 수은 중독으로 먼저 간 열다섯 살 아우들이 애오라지 노동으로 건축한 지상의 살아 있는 집 오늘밤 우리가 선뜻 잠들지 못하고 언젠간 신혼의 사랑이 빛날 나의 방을 꿈꾸듯 우리가 꿈꾸는 만큼 이루어왔어도 끝내 이루지 못할 지상의 방 한 칸을 생각한다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실천문학사 말복 - 이강..

한줄 詩 2018.08.18

위대한 겨냥 - 채풍묵

위대한 겨냥 - 채풍묵 휴게소 화장실에 급하게 들어선 옆 사내의 한 줄기 겨냥을 훔쳐본다 종족 번식 문명 발달 영토 확장 모두 겨냥의 산물이다 순록 같은 생존을 겨누던 투창 성벽에 갇힌 삼국 시대를 겨누던 화살 약소 영토를 겨누던 제국주의 대포 현지 문화를 겨누는 다국적 기업 전략 푸른 지구를 겨누는 인공위성의 렌즈 인류의 이어짐이란 주체를 달리하며 겨냥 할 표적 바꾸기의 연속 아니던가 선사 시대부터 장전해 온 총신을 바지춤에서 은밀하게 꺼낸 사내들 능숙한 겨냥으로 집중 사격을 단행하더니 총구를 탈탈 흔들어 흔적을 날려버린다 인류 탄생 이후 현재까지 이어온 가장 위대한 겨냥이 거기 있다 *시집, 멧돼지, 천년의시작 유목 - 채풍묵 수렵 채취 이후 생계 방식 중 가장 오래된 미래는* 유목이라고 한다 땅이야..

한줄 詩 2018.08.17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들깨 한 됫박의 소출도 못내는 등신이 내게로 왔다 황무지에 오면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나 못나 빠진 감들만 열리는 가을로 제 색깔을 다한다는 듯 서 있는 감나무 몇, 자갈돌 아카시아 뿌리로 엉켜 있는 무지렁이 밭이 나를 반겼다 계절과 계절 사이 만나 서로 몸을 기대고 싶은 산 까치들 이따금씩 울다가는 밭두둑, 어제 심은 2년생 덩굴 묘목이 병후의 초로처럼 떨고 있다 제 속에서 내보내고 다지는 것들, 기다리다 흔들리는 것들 발 아래 늪으로 투신하는 흰 눈을 보며 나는 자꾸 거칠어지려 한다 돌을 물고 있는 식물의 이빨이 내 등줄기를 적시면서 눈발을 받아내는 이곳까지 온 길이 충혈처럼 뜨겁다 내 안에 들고 싶은 어느 날, 자갈길 돌들도 모르게 찾아와 해묵은 얼룩 펼쳐서..

한줄 詩 2018.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