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들깨 한 됫박의 소출도 못내는 등신이 내게로 왔다 황무지에 오면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나 못나 빠진 감들만 열리는 가을로 제 색깔을 다한다는 듯 서 있는 감나무 몇, 자갈돌 아카시아 뿌리로 엉켜 있는 무지렁이 밭이 나를 반겼다 계절과 계절 사이 만나 서로 몸을 기대고 싶은 산 까치들 이따금씩 울다가는 밭두둑, 어제 심은 2년생 덩굴 묘목이 병후의 초로처럼 떨고 있다 제 속에서 내보내고 다지는 것들, 기다리다 흔들리는 것들 발 아래 늪으로 투신하는 흰 눈을 보며 나는 자꾸 거칠어지려 한다 돌을 물고 있는 식물의 이빨이 내 등줄기를 적시면서 눈발을 받아내는 이곳까지 온 길이 충혈처럼 뜨겁다 내 안에 들고 싶은 어느 날, 자갈길 돌들도 모르게 찾아와 해묵은 얼룩 펼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