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발효된 산 - 강영환

발효된 산 - 강영환 지리산을 가슴에 오래 담아 두었더니 잊어먹고 있어도 스스로 발효되어 갈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남부능 폭우 속을 젖은 발로 가거나 눈발 속을 얼어붙은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두류능선을 갈 때 땀내 속에 절여 두었던 산이 파도 몰려오는 한라산 어리목에서 불쑥 가슴을 뛰쳐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새가 되어 바람을 타는 날개 맛 언제나 강물 속으로 뛰어 드는 폐곡선을 따라 길마디 찍어 두었던 발자국이 떠오르고 야생화 한 떨기에도 쓰라렸던 관절 한데 섞여 발효가 된다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지리산은 더 깊어지고 높아지고 풍만해져서 사시사철 내가 모시고 살아도 땀내 전 발바닥에도 가 닿지 못한다 *시집, 다시 지리산을 간다. 책펴냄열린시 지리산 땀 냄새 - 강영환 스쳐가는 산꾼에게서 땀 냄새가 난..

한줄 詩 2018.08.07

주검의 눈빛 - 김이하

주검의 눈빛 - 김이하 -탄광묘지 8 여름, 사금파리의 분노를 아는가 쩡쩡한 대지의 기운이 소금에 절인 듯 한 뼘 그늘 속으로 몸을 옮길 때 불 속에서 타오르는 사금파리의 눈빛 몇 이파리의 절망을 매단 나무들 희망에 떠나왔다 깨어져 버린 어금니에 절망의 빈터에 핀 꽃을 씹으며 마지막 보따리에 어둠을 싸는 공동묘지와 같은 空山의 쓸쓸함이란 남은 자의 위안이다, 버려진 것들 비석 같은 굴뚝 속으로 느릿느릿 저녁 연기 피어오르고 밤의 정적이 돌아오던 쓸쓸한 풍경마저 장중한 공동의 울림처럼 가슴을 때리고 무자릿길 하냥없이 길 또한 그지없고 그립다, 여름 사금파리의 눈빛 담벼락, 어딘가에 독사의 눈빛으로 타오르던 삶이 뿌리고 간 지린내 같은 것! *시집, 타박타박. 새미 흑과 백 - 김이하 -탄광묘지 14 벼랑 ..

한줄 詩 2018.08.07

열흘 붉은 꽃 없다 - 이산하

열흘 붉은 꽃 없다 - 이산하 한 번에 다 필 수도 없겠지만 한 번에 다 질 수도 없겠지 피고 지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득음의 경지에 이른 물방울 속의 먼지처럼 보이다가도 안 보이지 한 번 붉은 잎들 두 번 붉지 않을 꽃들 너희들은 어찌하여 바라보는 눈의 깊이와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도 없이 다만, 피었으므로 지는가 제 무늬 고운 줄 모르고 제 빛깔 고유한 줄 모르면 차라리 피지나 말지 차라리 붉지나 말지 어쩌자고 깊어가는 먼지의 심연처럼 푸른 상처만 어루만지나 어쩌자고 뒤돌아볼 힘도 없이 그 먼지의 무늬만 세느냐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문학동네 어긋나는 생(生) - 이산하 내 몸에 나 있는 흉터들 내 몸에 묻어 있는 먼지들 이런 것들이 불현듯 나를 일깨운다 오늘 아침, 그 먼지들 자세히 들여..

한줄 詩 2018.08.07

치루 - 김승종

치루 - 김승종 게으르고 거칠었던 젊음이 가면서 괄약근에 길쭉하고 날카로운 대못 하나를 남겼다 몸안 깊은 곳에서부터 싸구려 술집 바닥의 지린내에 곰삭고 무허가 여인숙 늦은 아침 햇살에 담금질되어 쉴새없이 꾸준히 힘차게 자라난, 견실하고 육중한 대못을. 단 한군데 남아 있었지만 단 한번도 알지 못했던 항문 옆 연한 선홍색 주름살갗에 알아보려 해도 잘 알 수 없게 작고 작은 구멍이 막 뚫린다. 그 무엇도 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유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단 한군데 그곳에 *시집, 머리가 또 가렵다, 시와시학사 미련 - 김승종 격렬한 노동에 지친 이빨이 쉬는 사이 짓이겨진 고기 찌꺼기 이빨 사이에 끼여 신경을 건드린다 부드럽고 미끈한 혀를 집어넣어 굴리고 달래고 얼러도 얌전하게 몸을 웅크리..

한줄 詩 2018.08.07

우리의 단련 - 백상웅

우리의 단련 - 백상웅 온다. 월세 내는 날처럼 온다. 날은. 벽에 박힌 눈알을, 벽에 기댄 등짝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는 방을 가질 날. 온다. 좀비처럼 온다. 그날이 되면 곰팡이처럼 벽을 타고 울리는 감정들을 우리는 감사히 소유한다. 섹스와 키스를 포기한다. 소유보다는 공중화장실과 공동주방을 선택한다. 따지자면 오늘날의 고시원 같은 그날이 오고 있다. 백수, 택시기사, 용접공, 폐지 줍는 노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등의 형식을 가진 감정들이 컴컴하고 눅눅한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간다. 다 함께, 폭발적으로 문을 연다. 우리가 벽과 벽 사이에 잠들고 깰 때, 날은 주인을 피해 걸어온다. 이 방에서 송장 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아니라면 싸늘한 시체가 이미 실려나간 방이다. 오고 있다. 건물은 녹슨다..

한줄 詩 2018.08.07

운명 - 최정아

운명 - 최정아 열두 살 덧니 같은 산수유꽃 피네 구례 지나 산동 어디쯤 물안개 차오르는 아침 달력 속 눈발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관절통 앓던 아버지의 삽날이 건듯하네 봄 강물 풀리는 소리 살얼음 아래 흘러온 것이 강물뿐이겠느냐 갈아엎은 밭고랑도 봄볕을 베고 누웠는데 고단함을 치렁치렁 매달고 돌담길 돌아오는 늦은 저녁에 밥그릇엔 희망 한 조각이 불빛으로 얹히네 셀 수 없이 많은 꽃 모두가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쇠기러기 날아가는 긴 겨울밤을 견뎌온 때문이지 온갖 입성으로 제 몸 감싸온 사람들 노란 춘곤증도 달게 웃음으로 지우네 해마다 둘둘 말린 강물 펼치며 휘파람 스쳐간 바람 끝 언저리에도 먹구름 일어선 자리에도 세살 돋는 산수유꽃을 피우네 봄은. *시집, 밤에도 강물은 흐른다..

한줄 詩 2018.08.07

탱자나무 여인숙 - 서규정

탱자나무 여인숙 - 서규정 가시가 가시를 알아보듯 상처는 상처를 먼저 알아보지 맨살을 처음 감싸던 붕대가 기저귀이듯 쓰러져 누운 폐선 한 척의 기저귀를 마저 갈아주겠다고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바닷가엔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여인숙이 있지 들고, 나는 손님을 요와 이불로 털어 말리던 빨랫줄보다 안주인이 더 외로워 보이기를 바다보다 더 넓게 널린 상처가 따로 있다는 듯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들고 탱자나무에 내려앉는 흰 눈 모래 위엔 발자국 손님도 사랑도 거짓말처럼 왔다, 정말로 가버린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내 오랜 구기자나무 - 서규정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자, 꽃은 피고 새는 지저귀고 하늘처럼 청명한 마음의 나날을 만들자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반대로만 살았다 더럽고 치사하다 느낄 무..

한줄 詩 201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