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길 - 백성민

길 - 백성민 한발만 내딛으면 토끼가 산다는 저 먼 내일 앞에 서 있을까 절구 공에 빻아지는 것은 누구의 백골일까 어느 서리 깊은 날 신들의 조상을 위해 소복(素服)한 거리는 창백한 각혈을 한다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오래된 길 앞서 걷는 사람과 돌아보는 사람 모두는 생의 반환점을 돌았을까 수없이 보낸 암호에 답신은 달빛에 묻어나는 흰 자국뿐, 누군가 두고 갈 그 흔한 흔적 하나 달려오다 멈춘 풍경 안에 걸려 있고 그림자를 지우는 나무 아래 순한 눈빛은 오랜 바람 속을 서성인다. *시집, 워킹 푸어, 고요아침 위킹 푸어* - 백성민 그가 눈을 뜬 것은 새벽이 채 잠에서 깨지도 않은 시간이다 그의 자리 한 뼘 너머 행여 곤한 잠 속에서 불러내고 싶지 않은 미지근한 온기가 어둠처럼 웅크리고 있고 숨을 참아가..

한줄 詩 2018.08.30

녹슬지 않는 잠 - 김경성

녹슬지 않는 잠 - 김경성 방문이 내려앉았다 늙은 경첩을 물고 있는 못의 자리가 깊다 나무젓가락 분질러서 밀어 넣고 망치질을 했다 풀어진 문틀, 바람의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틈으로 새 못을 밀어 넣었다 언젠가 다시 벌어질 틈을 위하여 나무문을 세우는 못은 나사못이어야 한다고 나무의 결을 하나하나 읽으며 천천히 들어가서 못의 방을 만들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들이치는 바람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고 나이테에 새겨진 시간을 물고 있는 나사못의 틈으로 들어가는 바람이여 나무의 틈을 드나드는 그대여 틈과 틈 사이에 함께 정박해 있었구나 젖은 마음을 읽으며 나이테의 행간 속에 드는 못의 잠은 깊다 그대 가슴 안에 파놓은 못(池) 속에 드는 잠도 깊다 너무 깊어서 녹슬지 않는 잠이다 *시집, 내가 붉었던 것..

한줄 詩 2018.08.29

뽑히지 않는 사랑 - 박승민

뽑히지 않는 사랑 - 박승민 독에 메주가 가라앉듯 푹 삭아 떠오르지 않는 것 다리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심장이 무거운 것 밤이 낮으로 다시 밤낮으로 자꾸만 바뀌는 지구의 난폭한 자전축 모든 물방울들 전깃줄에 매달려 터지기 직전의 노래를 입에 틀어막고 있는 것 속이 빈 눈밭의 무처럼 파랗게 견디는 것 너를 한 번 견뎌보는 것 살아가는 한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어금니 - 박승민 국산 한 50년이면 오래 쓴 거라고 했다 결정적인 고비마다 어금니만 물고 살았으니 제일 먼저 탈이 나는 것도 당연 이때까지 거치른 북어대가리나 담배연기만 물렸으니 뿌리가 어디로 다리를 뻗을수 있었겠는가 골을 흔들며 뽑아낸 자리가 밥알 서너 개는 들어갈 듯 옴폭하다 속을 다 긁어..

한줄 詩 2018.08.29

당신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었다 - 김이하

당신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었다 - 김이하 이제 가서는 다시 오지 말라고 이제 두 번 다시는 인연을 짓지 말자고 부릅뜬 내 눈에 공굴댈 받치고 치유할 수 없는 독(毒)으로 팽팽한 금줄을 놓는다 그래서 멀리 가버린 당신들 가서는 나를 기억하지 않는 당신들 따뜻한 풍경에 취해 있거나 저물녘 한 사발 먹걸리에 취해 있거나 아니면 바람에 해작질을 하거나 당신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간 지 오래다, 붉은 감잎에 화가 나서 뱉어버린 침처럼 내 맘은 마른 지 오래다 그런게 가끔 변기로 쏟아지는 물소리 들으면 오줌 지리듯 번져 나는 내 눈의 그것! 그런 게 아니었다 미워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들을 들여놓을 수 없는 상식 밖의 나라에 있으므로 내가 가야 할 걸, 내가 갈 수 없었으므로 문패 하나 금줄 안에..

한줄 詩 2018.08.29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 서규정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 서규정 팽팽하게 당겨져 살고, 팽팽하게 박혀서 죽을 저 과녁을 마지막 화살로 이해해 가야 한다 겨냥, 사는 게 구지구질해선 안 돼 명중, 파르르 꼬리 떨리는 미세한 울분이라도 참아야 돼 사수가 쏘아 맞추는 것은 발등뿐 발사의 사거리가 짧다 아니다, 너무 길다 저 바람 한번 만져보려고 제 눈을 제가 찌르고 난 뒤의 사랑, 이거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끼니 - 서규정 바늘이 끼니였다 마른 호박잎 소리 없이 지듯 가세가 몰락하면서 어머니, 소쿠리를 들고 남의 밭둑을 지나가는 악극인처럼 시키지도 않은 춤과 재담을 늘어놓고도 늘 빈 소쿠리로 돌아와 바늘 하나 꽂을 땅이 없던 그 들판에선 끼니가 바늘이었다 더더구나 강물은 강둑을 타고 넘실거려 낮은 추녀 밑에서 오돌오돌 떨며 ..

한줄 詩 2018.08.29

노을, 비 개인 뒤의 - 홍신선

노을, 비 개인 뒤의 - 홍신선 1 허공엔 시멘트못 뽑힌 빈 구멍투성이다. 켤코 숱한 망치질에도 박히지 않던 완강한 빗줄기들이 언제 저리 박혔다 말끔히 뽑혀 나갔는가 해골바가지의 퀭한 눈자위 같은 못구멍 몇 군데서는 아직도 뽑혀 나오다 허리 절반 끊어진 화농한 남은 여우비 두어 줄기가 추깃물처럼 지르르 지르르 흘러내린다 속 깊이 박힌 채 숙주에게서 아프지 않게 삭아내린다 비 개인 서녘하늘에는 팩시밀리로 밀고 들어온 누군가의 감쪽같이 뚫어지고 해진 내면 몇 장. 2 꽉 딛고 선 발밑이 힘쓸 수 없게 뭉텅뭉텅 패어 나가는 시간의 급류 속에 꿈 없는 단색 잠이 중심 잃고 무슨 익사체처럼 넘어져 쓸린다 끔찍한 집착 뒤에 편안한 망각처럼 식어 들어오는, 저 철근 같은 신경을 얽힌 폐허. 이 종말은 다시 어느 아름..

한줄 詩 2018.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