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는 나비같이 - 김병호

마루안 2018. 8. 19. 11:45



그대는 나비같이 - 김병호

-樹木葬



나목으로 가득 찬 과수원 위로

그대를 날리면, 멀리로 돌아온 바람을 타고

그대는 한사코 내게만 밀려와

무작정 내 신발코에 앉으려고만 하는데

어쩌자고 그대가 만진 빈 가지는

철렁, 그늘을 내리는지

스물 한 살 묘지 안으로

햇살은 이렇게 어지러워야만 하는지


그대가 몸을 날리던 순간

그대가 흉내내고 싶었던 음(音)들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가지와 열매의 기억 사이

그 아슬한 반음 사이에서

그대는 어떻게 마지막 발걸음을 놓았는지

꽃 지운 가지 사이를 헤집는

나비의 날갯짓 닮은 어지러운 음들 사이에서

그대는 행여

나비의 꿈을 훔치고 싶었는지


나무에 엉켰던 기억들이 제 열매를 가꿀 때

그 몸짓들 사이에 문이 있어 그대는 날아가고

빈 가지마다 봄 햇살의 새순이 돋는데

나 이제 그늘 뒤로 돌아서야 하는데


꽃의 기억만으로 나비는 날아들고

그대는 어디에 나비같이 숨었는지



*시집, 달안을 걷다, 천년의시작








강가의 묘석(墓石) - 김병호



오래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거칠게 흔들던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려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낡고 깊은 날개짓을 한다


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사이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

강물에 닿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옮아 피는 앙상한 길

내 몸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변방의 밤하늘은 마른 저수지마냥

외롭고 가벼웠다

어둠 저편에서 절벽처럼 빛나는 녹슨 닻


생(生)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나는, 차마 묘석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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