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그리운 가족 - 박판식

그리운 가족 - 박판식 결점투성이 피와 피를 잇는 꽃과 나뭇잎 엉겨 붙은 혈관을 풀어 여덟 갈래로 소생하는 기적은 너무도 사소한 일 나뭇잎은 자라지 않는다 나뭇잎은 본래의 모양을 찾은 것뿐이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나뭇잎들의 뼈가 서걱거린다 피가 도는 푸른 혈관이 보인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처럼 나는 희망의 기후를 감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균을 저울질하며 눈물이 부풀어오르진 않는다 바람은 나뭇잎들의 위태로운 차양을 찢어놓는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좀처럼 한 가지 생각에 초점을 맞추지 못 한다 한랭의 기후를 견뎌낸 나무들을 누군가 전지하고 있다 그것은 갈고리 달린 창으로 발목을 끊어내는 고대의 살육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피가 솟구치는 일은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한줄 詩 2018.08.08

모두 다 과거 - 김익진

모두 다 과거 - 김익진 우리 은하, 안드로메다 별빛은 오래전에 떠나온 빛 오늘 태어난 별빛은 수백 광년 후에나 볼 수 있다 은하계에 생명체가 있어 교신을 한다면 오늘 보낸 신호에 대한 답은 오고가는 데만 수백 광년, 500만 년 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모두 과거의 빛과 파장, 소리 우리가 함께 현재를 살 수 있을까? *시집, 회전하는 직선, 조선문학사 꿈 - 김익진 삶이 한낮 꿈이었다는 말은 죽은 후 몸 밖으로 나와 허공에 붕 뜬 채 이곳을 내려다보아야 알 일 가벼운 군상들 틈에서 이곳을 내려다 봐야 몽롱했던 꿈들을 기억한다 신화 같이 시작된 여름밤의 꿈 멱 감고 고기 잡던 일 도시로 올라와 추웠던 봄날부터 헤어지고 만났던 사람들이 회전문처럼 지나간다 얼큰하고 비릿했던 청춘 광폭했던 ..

한줄 詩 2018.08.08

길모퉁이에서 풍금을 불다 - 허림

길모퉁이에서 풍금을 불다 - 허림 삼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나오면 풍금소리가 들리는 모퉁이 식당 몸빼 입은 임계댁이 고등어 굽는다 어디서 왔을까. 낯설게 바라보며 등뼈를 갈라 연탄불에 얹는다 고등어만큼 절은 저녁이 출렁거린다 생선의 비릿함이 연기로 자욱하다 모퉁이 식당 구이집 벽지마다 나 여기 다녀갔다는 문장이 가시처럼 선명하다 또 누군가 떠나려 한다 그러나 떠나기 어디 쉬운가 조씨의 주사를 임계댁은 받아넘긴다 밤 아홉 시 사십 분 직행버스에서 내린 어린 애인들이 키스를 한다 누가 풍금을 연주하는가 그녀를 배웅하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시집, 말 주머니, 북인 비를 기억하는 풍경의 트라우마 - 허림 구름이 붉게 서서히 불들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인 흰 도화지에 빼곡히 채워진 빗살무늬들..

한줄 詩 2018.08.08

아버지를 넘긴다 - 이강산

아버지를 넘긴다 - 이강산 벽에 걸린 사진 한 장 폭설에 파묻혀 저절로 흑백사진이 되어버린 식민지 사택 이사철마다 앨범과 수백 권의 책을 뒤져 십 년 만에 액자에 담았다 '올챙이 적 개구리를 꿈꾸던 집-89.12.24' 인화지 뒷면엔 그렇게 쓰여 있다 그 시절 로맨티스트 청년 하나가 천정 뚫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 슬픔의 채송화를 키우던 집 잃어버린 흑백사진 한 장이 더 있다 여든다섯에 이르도록 개구리가 되어본 적 없는 장돌뱅이 톱장수 아버지 그 올챙이 아버지를 찾아 벌겋게 녹슨 기억의 책갈피를 넘긴다 아아, 낡은 책갈피 따라 철벙철벙 넘어가는 올챙이의 무논들이여 아오지, 청진항, 관부연락선, 안면도, 춘천, 문의.... 어딘가 묻혀 있을 아버지를 세상에 꺼내놓는 일이 아버지에게 갇혀 있는 나의 탈출이라도..

한줄 詩 2018.08.07

고구마꽃 - 이동훈

고구마꽃 - 이동훈 꽃을 피우지 않는 식물은 없다고 그러셨죠. 질경이 돋아나던 돌밭 어디쯤이었을까요. 뚱딴지 무더기 피던 길모퉁이 어디였던가요. 고추 심고 감자 심던 밭두둑 어디였던가요. 생명 있는 것은 모두 꽃이라는 말씀이 갓 캐낸 감자알처럼 환하게 켜지더군요. 잘 계신가요. 씨알 여무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시더니. 못난 놈 잘난 놈 차별 없이 건사하면서 아이들 곁에서 꽃 피우는 재미로 살겠다고 하시더니. 당신이 떠난 자리엔 질경이가 시퍼래요. 너무 흔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도 꽃대를 바로 올리는 구둣발에 되우 밟히고 벌레에 숭숭 뚫렸어도 지천으로 살아오는 생명을 당신인 듯 봅니다. 땅속 어둠에서 주렁주렁 달려 나온 뚱딴지를 두고 빛보다 환한 어둠이라는 당신의 뚱딴지같은 소리를 ..

한줄 詩 2018.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