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스스로 만든 후회 - 김도연

마루안 2018. 8. 18. 21:39



스스로 만든 후회 - 김도연



금방이라도 실금이 갈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
쨍그랑 햇볕 부서진다
어디선가 그늘이 깨지고 균형 무너져
바스락거리는 오후


금 간 일상이 사금파리마다 은빛 꽃가루를 입힌다
갈피 모르는 시간이 아무 데서나 뒹굴고
희망은 그때
붉은 꽃을 피워 진하고도 독한 향기 내뿜다가
무더기로 시든다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우연히 찾아왔다가 뚜렷한 목적 없이
진득하게 기다려주기도 하다가
망설임 끝에 불쑥
앞 단추 하나 툭 떨어뜨리는 여인의 운명처럼
불운을 만나도 어이없이
웃어야 하는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정중히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스스로 만든 후회로 밤낮이 무겁고
나는 이제 뜬눈으로 불면증을 견뎌야 한다


사정없이 부는 태풍은 모질게 어린 꽃잎을 흔들고
덜컹덜컹 몸을 떠는 창가에서 마냥
게을러터져 더디 가는
여름



*시집, 엄마를 베꼈다, 문학의전당








내일이라는 버스 - 김도연



막차를 놓친 손에
승차권이 아닌 바퀴가 달렸으면 좋겠어.
다음 버스는 내일.
희망 버스는 내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벚나무 꽃잎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캄캄한 의자에 앉아 꽃잎을 센다.
꽃잎 셋, 꽃잎 아홉, 꽃잎 열다섯, 꽃잎 서른둘
내일을 기다리면 열매가 될 수 있을까.
오늘 버스가 영영 사라지면
내일 버스엔
무엇을 실을 수 있을까.


늙어버린 그믐달. 찌그러진 그믐달. 내일이 없는 그믐달.
그러나 울지 않는 그믐달.
아주 조금, 먼 내일
혼자 늙어버린 저 쓸쓸한 그믐달이 끝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버스에도 생애가 있었으면 좋겠어.


다음 버스는 내일.
내일은 희망이 태양을 만나러 가는 날.
오늘 마감인 이력서가
내일도 버스를 기다리는 날.
내일 버스는 희망.


국적도 없이 떠도는 캄캄한 고양이들. 내일을 믿지 않는 캄캄한 고양이들.
그런데 너희들의 나라는 어디니?
이 승차권을 너에게 주마.
 




# 김도연 시인은 1969년 충남 연기 출생으로 2012년 <시사사>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엄마를 베꼈다>가 첫 시집이다.


*시인의 말


살아 낸다는 것은
또 다른 나를 살기 위해 상처를 견뎌내는 일이라고
반문하던,


시답잖은
위안들이 있었다.


간밤 황량한 꿈속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반생만으로도 충분했던,
당신의 그 빛나던 치세가 그립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을 앓다 - 황규관  (0) 2018.08.18
꽃과 뼈 - 신철규  (0) 2018.08.18
위대한 겨냥 - 채풍묵  (0) 2018.08.17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0) 2018.08.17
이기의 발달사 - 김명기  (0) 2018.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