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 꿈 한 토막 - 정충화

마루안 2018. 8. 18. 22:38

 

 

여름 꿈 한 토막 - 정충화


나는 외가의 토방 아래 놓인
대나무 평상에 누워
어둠에 물들고 있다
마당을 기웃거리던 별 한 무더기
돌배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모깃불 연기에
눈을 끔벅거린다
외할머니의 곰방대에서
이따금 반딧불이 날아오르면, 뒤이어
해수 기침이 밤의 흉부를 찢는다
가뭄처럼 갈라진 기침소리에
덩달아 숨이 차 눈을 뜬다
나는 시간의 둑 너머 내 집 거실의
대나무 돗자리 위에 구겨져 있다
곁에선 긴 노동에 지친 선풍기가
더운 입김을 내뿜고
테레비는 혼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시집, 누군가의 배후, 문학의전당


 




팔월 이십 일 진료기록 - 정충화


위장병이 고리가 되어
일 년 넘게 만나는 명동내과 원장에게
나는 보름에 한 번꼴로
정신 감정을 받는다

뱃속을 찌르는 것은 병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야
마음을 열고 살어

성질이 못돼 먹었다는 것이
그녀가 짚어낸 내 병의 원인이다
감추고 살던 것들이
쌓이고 쌓였다가
하나씩 터지는 중이란다

내가 끌어안고 사는 것
마음 구석에 감춰둔 것은 무엇일까
전두엽의 미로를 뚫고
위벽까지 닿는 무엇이 병을 만드는 걸까

그 풀리지 않는 화두가 손톱을 세워
오늘도 내 위장에
통증의 기록 한 페이지를 써 넣는다




# 정충화 시인은 1959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2008년 계간 <작가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누군가의 배후>가 있다. 제7회 <부천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원,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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