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마루안 2018. 8. 17. 23:10

 

 

묵정밭 두둑에 그늘을 심다 - 이자규

 

 

들깨 한 됫박의 소출도 못내는 등신이 내게로 왔다

황무지에 오면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나

 

못나 빠진 감들만 열리는 가을로 제 색깔을 다한다는 듯 서 있는 감나무 몇,

자갈돌 아카시아 뿌리로 엉켜 있는 무지렁이 밭이 나를 반겼다

 

계절과 계절 사이 만나 서로 몸을 기대고 싶은 산 까치들 이따금씩 울다가는 밭두둑,

어제 심은 2년생 덩굴 묘목이 병후의 초로처럼 떨고 있다

 

제 속에서 내보내고 다지는 것들, 기다리다 흔들리는 것들

발 아래 늪으로 투신하는 흰 눈을 보며 나는 자꾸 거칠어지려 한다

 

돌을 물고 있는 식물의 이빨이 내 등줄기를 적시면서 눈발을 받아내는

이곳까지 온 길이 충혈처럼 뜨겁다

 

내 안에 들고 싶은 어느 날, 자갈길 돌들도 모르게 찾아와 해묵은 얼룩 펼쳐서 한 보름 앓고 누워도 좋을, 참다래 조롱조롱 매달린 터널, 초록유배에 들고 싶다 그런,

 

그러한 날은 올 것인가

 

 

*시집, 돌과 나비, 서정시학

 

 

 

 

 

 

한 숟갈의 기(氣) - 이자규

 

 

살아 있는 저승꽃 자리에 분첩 손 바빠진다 플라밍고와 싸이 춤을 흉내 내는 색깔마다에 잡아먹히는 주름들

 

오래된 일기장을 들추면 스페인 춤으로 떠오르다 다시 무거운 스텝 같은 기록, 보석 머리핀 같은 것이 외출을 부추기면서 해가 뜬다

 

따가워라 그만 봐, 거울이 화내기 전에 흑장미 꽃잎을 얹은 입술,

잘 살았다? 잘 못 살았다.

 

고슴도치와 허공의 동거

하기 싫은 섹스처럼 눈 질끈 감았다 뜨면 또 한세상이 가고 길의 끝에 당도하면 싱싱하게 새로 시작되는 길

 

관심 꺼버렸던 녹슬거나 검게 변하는 은 숟가락의 몸은

죽을 힘을 다해 땅을 거머쥔 난쟁이나무 옆 버려진 개가 쭈그리고 앉은 그림자의 허기다

 

한생애가 가시로 덮여서

그리움 한 발자국 받을 품도 못된 문패를 닦으면 백년은 더 버틸 것 같아

 

젖을 것들만 비벼 씹어 꿀꺼덕 삼키고 나면

내추럴 풍 메이크업의 기술도 그리 어렵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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