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헛발질 꽃 - 황동규

마루안 2018. 8. 19. 10:56



헛발질 꽃 - 황동규



어금니 두 개 뽑고, 솜뭉치 물고
저녁은 거르고
애꿎게 가만있는 식물도감만 뒤적인다.
오래 같이 산 꽃도
선만 보고 만 꽃도 있다.
어떤 놈은 너무 낯익어, 초면이지만,
혹 전생에 이웃 사이가 아니었을까?
쳐다보기만 하고 살다 어느 날 한쪽이 이사 간,
전생이 있다면,
나는 혹시 내 헛발질을 맛본 꽃은 아니었을까?
마을 입구에서 안 오는 버스, 안 오는 사람 기다리며
밟아 문지른 짚신나물꽃,
어쩐지 하늘보다 발밑이 훤하다 싶더니,
뭉개질 때
꽃도 이 못난 인간처럼 아팠을까?
지끈지끈 아픔 태어날 때
새삼 삶이 붙어 있는 몸의 깊이를
겪었을까?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








탁족(濯足) -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그대로 새겨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고 푼 것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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