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을 앓다 - 황규관

마루안 2018. 8. 18. 22:13



살을 앓다 - 황규관



몸이 흐른다
물길인가 불길인가
섬뜩한 바람의 아우성인가
너무도 다른 시간들이
몸을 이곳저곳 가르고 있다
쫓기던 기억들과 혼자 울던 담벼락 아래가
떠나지 않고 몸 안에서 부유하다니
한낱의 눈송이가 겨울 하늘을 이루듯
몸은 언제든 녹아내릴 수 있는 건가
역사나 국가 이전에
뜨겁고 고요하게 냉철하고 맹렬하게
몸을 헤치고 흐르려는 것의 정체를
지금 몸이 앓고 있다
혼미한 신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몸이 쪼개지듯 만큼 찾아오고
그렇게 불면의 몸 안에 머무는 것
이 누더기의 바늘땀이 풀릴까
식은땀이 아득하다
한 매듭 짓겠다는 아픔이
너무 어지럽다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마지막 남겨진 말 - 황규관



유언이라 할 수도 없는 말이 있다
변호사나 성공한 자식이 받아 적기에는
너무 뜨거운 말이 있다


듣는 이를 텅 비워버리는 말이 있다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당부가 아니라
고통스런 현재를 아주 힘겹게 전해주는 말
그러나 살아갈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해주는 말


20년 전기공이 합선시킨 7,000 볼트짜리 말
화물트럭 운전기사가 브레이크를 필사적으로 밟던
5톤이 훨씬 넘어서는 말
해고된 노동자가 30년간 흐느끼며 삭혀온 말
지금 그런 말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심오한 침묵마저 깨뜨리는 말들이
우리를 휘감고 있다


제 몸을 시커먼 잿더미로 만들어야
겨우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유언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비통한 말
길거리에서
쫓겨난 공장 밖에서
밀어도 열리지 않는 벽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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