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의 풍경들 - 손종수

마루안 2018. 8. 19. 10:42



빛의 풍경들 - 손종수



자몽 과즙 가득 채운 노을빛 때문인가.


해뜰녘이나 해질녘의 차이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풍정낭식(風定浪息)의 시간은 내락 없이 슬프다.


반백이 넘도록 눈맞춤해도 물리지 않는 손톱달 예리해도 위험하지 않은 이유를 아나?


가까이 있어도 먼 사랑의 눈빛이 그렇다.


아니, 멀리 있어도 가까운 사랑의 눈빛마저도 그렇다.


위태로울 만큼 아련한 마음조각들 채곡채곡 쌓이는 골목길 밤새 지킨 나트륨등 합장 고단해도 꺼지는 순간까지 따뜻한 기운 잃지 않기를.


껑충 키 큰 전신주 너머 우두커니 선 건물 옥상 하늘 위로 잿빛 꽃잎 점점점 깃발처럼 나부끼는 아침.


문득, 플라타너스 자리 베어낸 흔적도 없이 어느새 미루나무 홀로 서 있다.


가고 오는 때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디 그뿐인가.


누구도 쓸쓸하다 말해주지 않아서 저 혼자 쓸쓸한 빛의 풍경들.



*시집, 밥이 예수다, 북인








명왕성 이야기 - 손종수



오랫동안 누군가의 집이 되고 싶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동화책을 보다가 바느질하던 엄마의 눈과 마주친 아이의 웃음 같은 집


육성회비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났을 때 동네 골목까지 바래다준 슬픈 햇살과 그림자친구 같은 집


신문배달하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에 마음까지 온통 젖었을 때 불쑥 건네준 소녀의 노란 우산 같은 집


김장철 시장바닥에서 줍던 배추 겉대보다 더 시퍼런 인심의 틈새에서 손짓하던 포차 아저씨 오뎅 국물 같은 집


고속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 꿰뚫리고 공장 바닥 군용이불 속에서 밤새 앓던 소년의 아늑한 진땀 같은 집


모두 안 된다고 고개 저을 때 홀로 일어나 내가 하겠노라고 말하던 사내의 붉은, 붉은 뛰던 심장 같은 집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힘 가졌을 때 기다려주지 않고 떠난 미운 이름들 모두 불러다 밥 먹이고 싶은 사람의 집


기다리다가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누구의 집도 되지 못한 허공의 집



*명왕성은 1930년 2월 미국의 클라이드 톰보에 의해 발견되어 태양계 9번째 행성이 되었다가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에서 행성 분류법을 바꾸면서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소행성 목록에 134340이란 분류번호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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