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오늘이라는 이름 - 이기철 밀물이 안 올까 봐 썰물이 소리 내어 우는 건 아니다 해 질 녘 동해 바다는 모래톱까지 달려와서 운다 바다는 지구의 끝인가 시작인가, 물으며 내 안에 와서 금을 긋던 사람들 흉금 안쪽에 파란 색칠을 하던 사람들도 묻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추억이라 부르지만 나는 속도라 부른다 추억의 몽리구역까지 갔다 오는 데는 실로 한생이 걸린다 나는 인간의 시간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나는 농막에도 앉고 테트라포드에도 앉아 별점 치다 한 세기를 놓쳐 버렸다 놓친 세기는 역사박물관으로 간다 오늘은 모래의 밥을 먹으며 타고 남은 속마음을 바느질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오늘의 슬픔을 어디다 잠가 두면 새어 나가지 않을까 생각다가 갓 핀 잠자리난초를..

한줄 詩 2022.05.07

열등생 - 박용하

열등생 - 박용하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자신만 알고 있는 나무 곁에 서서 쫓겨난 집과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그 오랜 묵시의 동굴을 따라 지구 반대에서 태양을 건져 올린다 천천히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천천히 자신의 주소가 소나무 숲일 때까지 어떤 조롱이 그를 더 멀리까지 밤길을 굴리게 한다 어떤 질타가 그를 더 멀리까지 빗방울의 밤들을 꿈 밝히게 한다 상처받는 자들 그들도 달빛을 받는다 그 달빛으로 새들도 깃들이지 않는 벌판의 헛간에서 죽음을 나열하는 뒤죽박죽의 나뭇잎들을 탓하지 않으며 기억의 먼지들을, 모멸을, 생의 푸른 상처들을 불타는 물로 자존의 복수를 방전한다 스스로 구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번개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비의 눈빛들을 저 하늘의 달과 별 속에 풀어놓..

한줄 詩 2022.05.07

편지 - 박지영

편지 - 박지영 딸아, 엄마가 보듬고 산 25년의 결혼 생활은 벼락 맞은 감태나무 같았다 초로의 노인만 보면 무심하게 타고 내리는 버스에서도 가던 노선을 잃고 따라내려 킁킁거리며 마냥 눈물이 났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림이가 어느덧 밑동이 되어 울고 있었다 하루 치의 노동이 새벽에 이르러 멈출 때, 근근이 이어지는 속울음이 어깨 깃을 흔들고 떠나간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의 행간을 더듬을 때 날짐승처럼 꺽꺽거리며 출렁이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아들아, 꿈처럼 산 오늘이 너희가 밑동이 될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남은 너희들이 살아갈 날에 지팡이가 될 것이니 남은 노동은 얼마나 지난한 것이냐 하루 치의 노동에 한 스푼의 감사함으로 구멍 난 오늘을 꿰매며 살아라 인생이 벼락처럼 때리더라도 연수목이 되어라 ..

한줄 詩 2022.05.06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오일장 나이키 - 이우근 장세(場稅)를 못 낼 형편이라 외곽 담벼락 아래, 여기는 햇살이 참 따끈해요 그냥 모여 질끈 징검다리 놓아요 종일 기다려 몇 단 판 봄나물 파장 무렵, 눈길 끄는 저 신발 기술력이 좀 떨어진다고 나쁜 신발은 아니라네요 식구들 거 다 챙겨요 서울 것들, 눈여겨보지도 않을 테지만 임대료 유통마진 브랜드파워 세금까지 후려치고도 거뜬하다네요 서민경제 기여한다고도 하고, 그래서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더라도 가야할 길, 조여매고 가고 싶어요 꼭 가요 이류(二流)라도 일류 흉내 내면서 결국엔 가장 하류가 되면 마음 편할 거라 생각해요 나는 가당찮은 희망을 꿈꾸지 않아요 옆 난전에서 만 원 석 장 트렁크 팬티도 마저 사서 입고 거침없이 달려 볼까나.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묵호..

한줄 詩 2022.05.06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 김명기

악을 쓰며 짖는 개에게 - 김명기 나도 살자고 한 일이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기억하는 것을 지우고 숙명이란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관계는 참 비통하지 버리고 돌아선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어디선가 속죄를 대신 할 사람이 너를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벽에 머리를 찧으며 끊임없이 왜냐고 묻고 있지만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공손한 너를 데리고 저녁 한때를 걸어가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오늘만은 살아야겠다고 발버둥 치는 우리는 같은 족속일지도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는 아나키처럼 서로의 슬픔을 막아서는 중이다 더 이상 맨발인 너를 위해 해 줄 게 없구나 곧 체념이 친구처럼 옆에 와 누울 것이다 쏟아붓는 기원과 비통은 회랑..

한줄 詩 2022.05.03

가끔 구름 많음 오후 한때 소나기 - 송병호

가끔 구름 많음 오후 한때 소나기 - 송병호 일기예보에 벌이나 나비가 관여할 수 있을까? 휴대전화나 비밀번호는 암호화되어 있는데 예보는 예보와 상관없이 모호한 자리를 암호화한다 점친다는 것.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그만이지만 심기가 불편하다 밑줄 친 그래프에 마침표가 없는 부호는 끝이 아닌 꽃의 농담 같다 얇은 외출을 만지작거리는 비구름의 속삭임 햇볕에 구운 바삭한 찻잎 부각을 찻잔에 올린다 안개알갱이가 이동하는 후텁한 습濕 소나기가 오려나 믿었던 외출이 젖어 진정할 수밖에 없었던 냉정, 자기 결여는 증상을 짚지만 꼬리 잘린 도마뱀의 행적이 묘연한 추측성 요행으로 점쳐보는 배후, 뜻밖에 날숨을 고르듯 제2막을 예보한다 구멍 숭숭한 나뭇잎을 가로지른 자벌레 여전히 무엇을 재고 있다 *시집/ 괄호는 다음을 ..

한줄 詩 2022.05.03

봄날 이력서 - 서화성

봄날 이력서 - 서화성 봄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내 고향은 어느 먼지가 뿌연 두메산골인지 무소식을 짊어진 우체부가 사라지는 어느 골목길인지 서너 달 걸려 소독차 꽁무니를 쫓아갔던 그날부터일까 아래 이장집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저녁 무렵인지 고구마를 굽는다며 얼굴까지 타버린 그날인지 막차가 떠난 밤길을 걸어서 왔던 어느 논두렁인지 건넛마을에 마실 간 엄마가 돌아왔던 달빛부터일까 까까머리에 가슴을 움켜쥐고 여학교를 지나갔던 시절인지 모캣불을 피우며 떨리던 손을 잡았던 그날인지 읍내 제일 큰 빵집에서 미팅한 오월부터 시작일까 이브 날에 걸었던 어느 키가 커버린 철둑길인지 코스모스가 뜬눈으로 설레게 한 어느 가을날인지 밤새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첫눈이 내린 산동네인지 답장을 기다리며 꾹꾹 눌러 쓴 밤편지..

한줄 詩 2022.05.02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 류시화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 - 류시화 ​ 목련꽃 필 때쯤 이따금 혼잣말하네 슬픈 것은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진 방식 때문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나 다른 방식으로 헤어지는 것이라고 그것만이 옛사랑을 구원할 수 있다고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그런 사람 - 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

한줄 詩 2022.05.02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슬픔을 삼키는 계단 - 강시현 볼 때마다 주름이 더 패어 있는 시간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 봅니다 봄날의 주름은 청보리밭 이랑을 안고 산들바람에 일렁입니다 파란 허공의 주름은 응고되어서 안타까운 연애 같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주름은 살아서 숨을 쉽니다 가시가 뱉어 내는 붉은 줄장미의 화원을 거닐어 보셨습니까 평지의 중심에서 태어나 꼭대기로 가는 길을 내주었으나 흙 묻은 시간의 가시가 가슴을 깊숙이 찔러 신음을 삼키던 높이의 풍경은 어떻던가요 코끼리가 흰 다리로 지키는 따뜻한 사원을 지나가 보셨습니까 안온의 자궁에서 태어나 평온의 일상을 꿈꾸었지만 기다림의 과녁에 꽂혀 바닥의 웅장한 탯줄을 잘라 내던 딱딱한 충고의 혓바닥은 또 어떻던가요 슬픔을 삼키는 계단은 삼우제의 봉분처럼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

한줄 詩 2022.05.02

바람은 너의 소멸로부터 오고 - 박두규

바람은 너의 소멸로부터 오고 - 박두규 바람이 분다 모든 걸 쓸고 갈 거대한 해일을 몰고 그렇게 두려움은 언제나 죽음으로부터 오지만 그 죽음의 두려움을 넘을 수 있는 건 스스로를 버려야만 하는 것 거대한 바람이 불어 오랜 억압과 폭력을 쓸어낼 수 있는 건 모두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건 나 하나 먼저 스스로를 버려야만 하는 것 그토록 바람은 나의 소멸로부터 오고 바람은 멈추는 순간 바람이 아니니 어디론가 끝내 흐르는 것이며 누군가에 이르러 변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미얀마의 바람은 미얀마의 죽음으로부터 불기 시작했다 불타는 도시 양곤의 아스팔트에 쏟아낸 그대들의 피가 이젠 지구별 모든 사람들의 피가 되었다 어느 날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처럼 그렇게 그대들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

한줄 詩 202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