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희망자원 앞에서 - 박숙경

희망자원 앞에서 - 박숙경 사라진 별을 생각하느라 잠을 놓쳤다면 하현달은 불면의 공범 흘러내리는 하품을 손수레에 앉혀 막다른 골목 기웃거리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한 줌의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까? 쓸모없어 버려진 것들과 쓸모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과 펴진 것은 주름잡고 주름진 것은 곧잘 폈을 낡은 이야기와 한때는 최신형으로 잘나갔을 과거의 슬픈 노래와 부서지고 닳은 것들의 최후진술들이 닫힌 철문 앞에 모였다 경멸과 연민과 곱지 않은 시선을 따돌리고 반복적으로 굽신거린 허리가 발굴한 고물과 처음부터 고물로 태어난 고물과 알면 돈이 되는 고물과 기타 등등의 잡동사니들과 불법과 합법 사이의 아슬아슬한 편견들 빠진 발톱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했나요? 거친 손바닥에 쥐어진 몇 닢의 지전을 꿀꺽..

한줄 詩 2022.05.01

닻 - 우대식

닻 - 우대식 참 많은 문신을 보았지만 문신이란 오직 닻 하나 하급선원으로 떠돌았을 사내의 팔뚝에 겨우 매달린 그것, 끝내 정주할 수 없다는 예감으로 문신은 희미해진다 불 꺼진 항구에 수없이 닻을 내렸을 테지만 닳아빠진 그것을 슬그머니 건져 올리는 새벽 남쪽의 별들은 사내의 등을 내려다본다 닻 위에 별을 하나 그려놓아도 좋겠지만 그것은 지고지순이 아니다 저 지고지순은 언제쯤 희미해지는가 다 닳은 지고지순을 안고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항구에 배를 댈 때 별의 슬픔과 닻의 슬픔이 슬픔을 참아가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지고이네르 지고지순 지고이네르의 지고지순 닻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봄날은 간다 - 우대식 허무의 절창 봄날은 간다 그렇게 사라져야지 꽃잎이 물에 떠서 사라지듯 알뜰한 당신이나 생..

한줄 詩 2022.04.30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여름으로 - 박찬호 행복한가 가을바람이 서늘한 물음을 보냈다 알고 묻는 것일까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어 잠시 멍하니 있는 내게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묻는다 혹시나 그리운가 창밖 흰 눈은 저리도 예쁜데 진즉 돌아왔어야 할 그이는 보이지 않고 되돌아보니 지난했던 그 한때를 두리번거리며 배회하는 나를 싸한 겨울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몰려와 시린 내 귓볼을 때리며 묻는다 그래서 외로운가 때 이른 봄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다 내 발아래 멈춰서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단지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뿐인데 내가 그리도 절박해 보였냐고 내게 네게 되묻는다 정말로 두려운가 여름 진한 햇볕 아래 잠시 묻어 두었던 외로움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 외로움은 종종 그리움..

한줄 詩 2022.04.30

봄밤 - 김정미

봄밤 - 김정미 까마귀 부리는 그날 운세였다 환풍기 날개 깊숙이 붉은 패를 밀어 넣고 아랑곳하지 않는 제발과 잠시 불타버렸다 불탄 순간은 홀로 어두워지다 얼룩을 남기며 깊어지는 중이었다 죽은 새를 죽은 패로 자꾸만 잘못 발음했다 비 맞은 날이면 점괘에 젖지 않는 오늘을 두꺼운 전집으로 갖고 싶었다 무너진 바닥을 믿지 않는 편이어서 고요한 모서리들은 손에서 미끄러지다 고딕의 자세를 놓치곤 했다 그을린 멈춘 새를 마지막까지 열지 않았다 퉁퉁 불은 손금을 물고 오는 부리를 오독할 때마다 뒤집어진 밑장 하나 본 것도 같다 검은 싸리나무를 건너오는 내 안에 나를 만날 때마다 검은 재가 자꾸 묻어 있었다 울면 아무래도 나쁜 패를 손에 쥐는 일이어서 조용하게 밥을 지었다 죽은 쥐를 끌고 가는 그림자를 보았다 나를 응..

한줄 詩 2022.04.29

일생 한 일 - 장시우

일생 한 일 - 장시우 개구리가 알을 슬고 간 무논 영문도 모르고 알에서 깬 올챙이는 고여 있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일이 전부인 양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든다 웅덩이를 살아가는 그들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해 풀쩍 뛰어넘지 못한다 봄볕에 말라 버린 무논이 그들의 선택지는 아니었는데 날개를 달아 준 것도 아니기에 어쩌다 놓인 말라 가는 논에서 몸부림치다 말라 가는 일이 태어나서 한 일의 전부 뜨거운 햇볕 아래 벌거벗은 몸으로 몸부림치는 일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끝과 시작에 절망한 일이 전부 그리하여 어느 날 흔적이 소리 없이 지워지는 일 벗어나려 꼬리를 파닥이는 일 그것이 일생 한 일 *시집/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걷는사람 봄날이 있다 - 장시우 녹슨 드럼통이 키우는 개구리알 언제부터였을까 버려진..

한줄 詩 2022.04.29

발바닥의 생 - 이현조

발바닥의 생 - 이현조 가운데가 움푹하다 하늘을 닮았다 서쪽 끝에서 시작된 걸음마는 고단한 보행을 지나 지금은 천기를 읽을 나이 으르렁대는 천둥 뚫고 각질 더덕한 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중이다 시끌벅적 물장구 치는 아이들 돌부리에 치이며 졸졸대는 시냇물 물 등에 얹힌 시간의 주름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몸을 지탱하며 앞만 보던 엄지발가락이 한풀 꺾여 하늘 향해 있다 *시집/ 늦은 꽃/ 삶창 늦은 꽃 - 이현조 올해는 가물어서 꽃이 안 피나 봐 아내의 속을 태우더니 여름 장마보다 긴 가을장마에 일제히 꽃망울 터트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안 아픈 손가락 있다 똑같이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 있다 아내는 셋째에게만 애정 표현 안 한다고 셋째는 자식도 아니라고 어머니..

한줄 詩 2022.04.28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접히는 부분이 헐거운 골목 - 이성배 폐지를 줍던 노인이 치킨집 앞에서 상자 밑바닥의 테이프를 뜯자 골목이 헐렁헐렁해진다. 골목의 벽들은 갈라지고 기울어 바람의 마을을 재개발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집이든 대문이나 현관 신발장에 노끈 뭉치나 테이프가 있는 것은 느닷없이 접히는 부분이 찢어지거나 밑이 빠지는 생활을 여미는 데 요긴하기 때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주름진 몸이 수월하다는 듯 이 골목 사람들의 몸도 접히는 부분이 많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이 골목에서는 다 한 짐 거리 노끈으로 꽉 묶으면 그만 허리 굽은 노인이 모서리에 비가 샌 흔적이 있는 빈집을 질질 끌고 가는 사이 뒤쪽이 유리 테이프로 꼼꼼하게 여며진 달이 뜨고 있었다.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고두미 꽃의 가계(家系)..

한줄 詩 2022.04.27

반달 - 김승종

반달 - 김승종 태평동 여인숙 골목 요양원으로 아내 따라 그는 장인 뵈러 간다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돛대 없이 난발 장인은 늙어 가고 삿대 없이 단발 아내는 어려 가는데 누가 토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눈썹 사이 주름 같은 그 길로 다시 이른 자리 해병 이병처럼 각지게 머리 깎여 미용사 출신 원장 옆에서 한 번 웃다가 엎드리고 막무가내로 끼니 외면한다 그가 앉히려다 식욕 같은 힘에 물러서고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 뜨지 않는다 누구에게 분노하는 건가 혹 자신에겐가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태평동 붉은 창문 닫힌 여인숙 골목 고개 숙이고 그는 아내 따라가 눈 감고 분노하는 장인 뵈어야 한다 어제인지 내일인지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서쪽 나라로 갔던 장모가 절구를 찧..

한줄 詩 2022.04.27

구름의 사주 - 윤향기

구름의 사주 - 윤향기 빈 들녘에 연기가 자욱하다. 짚 타는 연기가 매캐한 외로움이 되어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자 한다. 까마득한 하늘로 우르르 몰려가 새털구름을 훔쳐보거나 여우비에게 접근했다가 따귀를 맞고 홀로 지상으로 추락할 때도, 존재의 심연에 곤두박질하여 통곡의 볼륨을 올릴 때도 다 지났다. 저녁노을에 머리를 물들이면서부터는 구름의 눈물 닦아 주는 역할을 도맡고 레퀴엠(진혼곡) 듣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구름의 손바닥을 펴 본다. 구름 모자를 쓴 물고기 한 마리 천상의 춤을 멈추고 이제는 결가부좌다. 옴!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 천년의시작 벼락을 맞다 - 윤향기 TV가 말했다. 꽃을 오래 보려면 물속에 설탕을 조금 넣으라고 어버이날 꽃바구니가 배달되..

한줄 詩 2022.04.27

귀신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이현승

귀신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이현승 스승이 없었다면 오늘날 네가 있었겠느냐 하지만 제자가 없다면 스승이 있겠습니까. 가르치는 일이 배우는 일이기도 하고 교학상장이란 말도 있지만 배우겠다는 사람은 없는데 가르치려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가. 본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 예의는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은 궁금한 건 많은데 알려주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공부는 지식만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서 학교가 반드시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라서 커피숍도 있고, 화장품 가게도 있는 학교에는 학교가 없고, 제자가 없고, 스승이 없고, 가끔 친구는 있는데 교장선생님 말씀과 주례사의 미덕은 올바름에 있지 않고 그건 눈높이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길이의 문제이다. 짧아야 ..

한줄 詩 2022.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