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불면 1 - 한명희

불면 1 - 한명희 -난간 난간 위에 서 있던 어젯밤 길가에 습관처럼 서 있던 당신은 택시 기사와 드잡이한다 갑자기 사라진 어느 집을 두고 잠 못 들던 어젯밤과 무관하게 먹은 것도 없이 배가 부르다던 누구와도 무관하게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바람은 바람끼리 서로의 몸을 비틀고 매만져 장송곡 같은 저음의 노래를 만들고 흙빛이 된 하늘과 핏줄을 드러낸 나무는 난간보다 낮은 집에 팔을 뻗고 회초리를 든다 허물어진 집을 다시 짓거나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밤을 달리는 사람들이 당신만은 아니었으므로 당신을 지나쳐 온 집들과 앞서간 집들은 여전히 속도를 무시하고 눈을 보면 불쑥불쑥 솟아 있는 빌딩처럼 이 층으로 가는 난간에 기대 있다 뒤처져 마음만 앞서 오르는 나는 캄캄한 오밤중, 밤새 대궐 같은 집을 혼자 짓다 부수고..

한줄 詩 2022.04.25

죽은 설교자 - 최규환

죽은 설교자 - 최규환 오래된 어촌 상회에서 컵라면을 말아먹던 사람 엽서에 적힌 안부가 궁금해 뜨거움을 불면서 해가 지고 있다고만 말하고 세상 누구보다 고독한 등을 보이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그가 적어놓은 운율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밀이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정말이지 가까운 약속이 오고야 말았고 빼곡한 노트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부서질 듯 무너질 듯 삶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죽음일 거라 여기면서 세상은 빛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늘에 담긴 내용을 읽고 가는 울음일 거라 말하면서 바람 부는 방향에서 회오리가 쳤는데 오늘처럼 먼 산 보는 일이 잦았던 어느 봄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였으나 집으로 가는 길은 마음만으론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견디는 식물의 맘 어..

한줄 詩 2022.04.23

나사렛 2 - 전대호

나사렛 2 - 전대호 방위할 때 역전에서 마주치던 창녀들을 기억한다. 그는 나사렛 사람, 창녀의 친구. 엠비씨 신인왕 출신의 전직 복서 강 사범에게, 형, 사람 때리면 기분이 어때? 하니, 사람은 묶어놓고 때려본 놈들이 제일 잘 때려, 하더군. 봇이라도 좋으니 클릭해줘, 짜릿한 클릭, 황홀한 클릭. 네가 교수가 될 줄 알았어. 부동산 하는 친구가 나를 50층 옥상 전망대로 이끈다. 저쪽은 동탄, 이쪽은 광교. 강 사범은 퀼른에서 불량배 세 명의 빗장뼈 연골을 부러뜨린 적이 있다. 경찰이 무기를 내놓으라 다그쳤을 때 강 사범이 내민 것은, 맨손이었다. 봇이라도 좋으니 날 교수로 불러줘, 짜릿짜릿 교수, 으쓱으쓱 교수. 방위할 때 역전에서 마주치던 창녀들을 기억한다. 나사렛 아가씨들, 나사렛 아줌마들. *시..

한줄 詩 2022.04.23

별똥별은 아프다 - 이영춘

별똥별은 아프다 - 이영춘 발자국 하나 남기려고 저토록 몸부림치는 꽃잎들 꽃잎 속에서 물방울이 튄다 꽃잎 속에서 바람에 분다 물 오른 나무 한 그루 하얗게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 그림자들이 숨어드는 그 꽃잎 숲에 이름표를 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이 별을 안고 별처럼 어둠을 뚫고 간다 닿을 수 없는 저 허공의 아득한 하늘 끝자락에 구름 기둥 하나 둥둥 떠간다 물방울 기둥 하나 하얀 가루로 부서져 내린다 어제는 심장에 방아쇠를 당긴 헤밍웨이가 깃발을 올리고 오늘은 긴 코트 자락에 자갈돌을 삼킨 울프가 강물 속으로 걸어간다 내일은 반 고흐가 귀 없는 귀로 오베르 밀밭으로 걸어 들어가 잘라낸 귀 한쪽을 찾아 총총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지상은 문을 닫는다 이름 없이 사라질 꽃잎, 꽃잎들 별..

한줄 詩 2022.04.22

어머니의 끼니 - 김용태

어머니의 끼니 - 김용태 내가 개(犬)와 다를 게 없나니 비쩍 마른 어미의 젖을 빨아대는 살집 투실한 강아지를 아버지께선 자주 떼어놓곤 하셨는데 내 어릴 적 배고픔도 고픔이려니와 빵을 얻어먹는 재미 또한 쏠쏠하여 하굣길엔 취로사업중인 어머니를 버릇처럼 찾아갔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흘러내린 코를 닦아 주시며 품에서 빵을 꺼내 건네셨고 철없이 그 걸 받아 달게 먹고 돌아서는 순간, 점심을 또 자식놈한테 빼앗겼으니 기나 긴 해를 어떻게 견딜 거냐며 어머니를 나무라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산새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산골 시오릿길을 엄마, 엄마라는 이름을 그 새처럼 부르며 울며 내려 온 그날 이후, 비로소 죽순처럼 자란 내 소견과 당신의 끼니를 바꿀 수가 있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

한줄 詩 2022.04.22

밥할 자격 - 김륭

밥할 자격 - 김륭 쌀을 씻어 안치다, 문득 고양이 밥부터 챙긴다 이럴 땐 나도 발이 네 개인 것처럼 착하다 작은 밥그릇 앞에서 한순간 세상의 전부가 된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밥그릇 속에 머리부터 집어넣고서는 굳건하다 아기 고양이, 아기를 버티는 있는 네 개의 발 새가 온다, 나비가 온다, 발을 가지러 아기를 가지러 운 좋은 날이면 귀뚜라미를 톡톡 두드려 울음을 꺼내듯 한 생을 건너 밥그릇이다, 하나뿐인 밥그릇 하나를 지키기 위해 버티고 선 저, 네 개의 발은 잘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부장(副葬)이다 죽어서도 뛸 수 있는 심장의 상상력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시집/ 나의 머랭 선생님/ 시인의 일요일 나는 이 이야기를 나의 머랭 선생님에게 해 주었다 - 김륭 좀 많이 늦었지만 결혼을..

한줄 詩 2022.04.21

행복 - 심재휘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은 날도 있어야지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신발 모양 어둠 - 심재휘 끈이 서로 묶인 운동화 한켤레가 전깃줄에 높이 걸려 있다 오래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어느 저녁에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 키 작은 아이가 있었으리라 허공의 신발이야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치자 구두를 신어도 맨발 같던 저녁은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오늘은 ..

한줄 詩 2022.04.21

어둠도 빛이 - 권순학

어둠도 빛이 - 권순학 사월이 잔인한 것은 흐드러진 꽃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오기 때문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에스프레소 같은 날도 아포카토 같은 때도 있지만 잔만 바라보아야 하는 날 많고 빈 잔조차 없는 날 더 많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밤마다 글썽이는 별 누굴 찾으며 낮에도 저러고 있다고 그 뒤에 그가 있다고 누군가 말할 줄 알았다 누구는 잊고 누구는 세고 누군가는 세며 잊지만 어둠도 빛이 될 수 있다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시집/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문학의전당 비교 - 권순학 참 익숙하지만 무거운 그 말 누구나 무엇이든 적어도 한번쯤은 그 제물로 바쳐졌겠지만 SNS의 화젯거리 '계란 판과 갓 나온 종이 신문' 그들 효용성을 비교한다 바늘구멍으로 보거나 그..

한줄 詩 2022.04.18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 나호열

목주름이거나 목걸이거나 - 나호열 한평생을 목줄에 묶여 이곳까지 왔다 굴복인지 서툰 깨달음인지 이리저리 끌려다녔다는 슬픔과 아니, 한평생을 질긴 목줄을 끊으려고 이가 닳고 몸이 이지러졌다는 노여움이 내게 목줄을 채운 그를 그립게 한다 끈질긴 추격자를 피해 몸을 부숴버린 바람이 당도한 망명지처럼 목주름은 세월이 내게 준 값나가는 목걸이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되어 또 한 줄의 문신을 새기는 죽은 봄이다 *시집/ 안부/ 밥북 고시원 - 나호열 개천의 지렁이가 용이 되려면 고시(考試)가 외길이었지 청춘을 불사르고 가는 벼랑길 십 년 전쯤 우연히 만난 친구가 고시원에 있다 하기에 면박을 주었지 이제 용이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 허튼 꿈을 버리라고 했지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의 등이 마지막 모습 ..

한줄 詩 2022.04.18

꽃의 속도 - 복효근

꽃의 속도 - 복효근 주걱모양 조각도처럼 꽃잎이 허공을 조금씩 파고 있다 파인 허공 미세한 가루로 흩어져 날리지만 너무 고와서 나비의 눈을 가리지 않는다 빽빽한 공기가 파여 나가고 빛 조각 분분하다 부서진 빛 가루를 제 몸에 갖다 붙이며 꽃잎이 자란다 조각도가 허공을 파는 소리를 한순간에 몰아놓으면 천둥소리가 날 것이므로 그러면 수많은 벌이 길을 잃을 것이므로 달이 채워지는 속도로 제 몸에 딱 맞는 크기의 허공에 꽃은 꽃을 채워놓는다 저마다 속도를 맞추는 별이 달라서 어떤 꽃은 안드로메다의 별에 제 눈을 맞춰두고 핀다 그리고 다시 잠시 빌렸던 허공을 허공으로 채워놓기 위해 햇빛에게 빌린 것 햇빛에게 어둠에 빚진 것 어둠에게 돌려준다 다녀가는 나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그 자리를 메꾸는 소리에 아무도 놀라..

한줄 詩 2022.04.17